생애 - 강준일의 삶(전체보기)

강준일선생님과의 대담(1차대담: 2005.02) 강준일 선생님 정릉 자택 및 여주 작업실, 민음협대담: 2005.01.07. 민음협 사무실, 2차대담: 2015.02, 여주 작업실)을 기초로 Fact Check(사전, 인터넷 검색 등), 신문기사, 지인들의 설명 등을 종합하여 이미경님, 강은구님에 의해 구성된 것입니다.

“ ”안의 내용은 모두 강준일선생님과의 대담에서 선생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인용된 신문기사에는 말미에 출처를 기록하였습니다.

1. 작곡가

강준일은 1944년 12월 5일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 음대 작곡과에서 수학했다. 1970년 서울음악학회(Seoul Musicians' Academy)를 창립한 이후 매년 SMA 음악캠프를 주관하였으며, 1983년부터 2011년까지 창작가곡발표회 ‘겨울나무’를 매년 개최하여 우리 현대어의 음악화를 모색해왔다. 1986년 이후에는 창작동인회 ‘제3세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1988년 88올림픽 개폐회식 음악위원 및 1994-97년 한국민족음악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전통예술원에 출강해왔고, 전통예술원 한국음악창작과 객원교수로 재직했다.

전업 작곡가로서 평생 우리 전통음악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몰두해왔으며, 100여곡이 넘는 작품들 가운데 대표작으로는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마당>, <푸리>, 사물놀이와 피아노를 위한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 관현악곡 <난파회상>, <천년천세>, 국악관현악을 위한 <풍물>, <소리그림자 1번>(첼로 협연), <소리그림자 2번>(해금과 바이올린 협연), 현악합주곡 <현을 위한 시나위>, <닫는 소리>,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삼행절곡>, 구음을 위한 <소리타래>, 장고, 첼로, 피아노를 위한 <해맞이굿>, 클라리넷 4중주 <속요사구(俗謠四句)>, 가야금과 현악사중주를 위한 <소금곡(素琴曲)>, 대금삼중주 <한거사락(閑居四樂)>, 바이올린 독주곡 <슬픈노래>, <번뇌의 춤>, 클라리넷 독주곡 <허튼소리>, 첼로 독주곡 <경기 민요 주제에 의한 소곡>, 피아노 독주곡 <아이들의 나라>, <산수곡>, 가곡집 <마일의 노래>, <그림 있는 노래>, <낭송있는 노래>, <시풍류>, 음악극 <돌사젼>,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 무용곡 <호곡(號哭)>, <비나리>, 춤 노래 합 창 관현악을 위한 총체극 <백월산이 충천하여>, <합주해금을 위한 “민요유람”>  등 다수와 저서 󰡔서양음악문화사비판󰡕, 󰡔음악에로의 입문󰡕 등이 있다.

 

2. 어린시절

#부모님 #가정환경 #고향

강준일은 아버지 강갑문(姜甲文)과 어머니 최정란(崔貞蘭)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갑문은 한일은행 지점장을 지낸 인사였다. 또한 교회 장로로서 성가대를 지휘하였는데, 당시 기독교는 기독사회주의가 유행이 되어서 기독교를 믿는 젊은 청년들 중에는 나라를 위해서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강준일의 부친도 젊었을 때는 80년대 학생운동권의 민족해방운동과 비슷한 류의 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신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인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서양음악적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어렸을 때 한국은 여전히 농경사회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고, 그의 고향 충남 서천은 더더욱 그러했다. 이러한 문화적 이중성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저희는 여러분들과 조금 다른 시대에 살았는데, 농경사회의 맨 마지막 끝 장면을 경험했어요. 적어도 내가 한 10대 중반, 아니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우리 아버지 고향에 가면 아직도 농경사회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그 풍습과 문화에 상당히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살다가, 갑자기 변하는 시대를 후반에 살게 되었죠... 내가 자라난 지역적인 환경이나 경험은 전혀 서구적인 음악이 아닌 것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것과 저것의 두 가지가 따로따로 공존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민음협 대담)

 

#서울대 물리학과(1963년) #수학과 음악

그는 1963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젊은 시절 매일 수학문제 하나씩을 풀었다고 소회할 정도로 수학과 물리학을 좋아했다. 그는 자주 음악을 물리학에 비유하고, 음악가를 물리학자와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언급하였다. 물리학자는 수학적 공식이 현상적으로 물리세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밝히는 사람이라면, 작곡가들도 어떤 원리를 음악적 현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물리학과 작곡의 작업방식이 유사하다고 보고 있다.

 

“물리학을 하지 않았다면 혼자서 곡을 만들 수 없었을 거예요. 수학을 응용해서 어떻게든 현실을 찾아내는 것이 물리학이죠, 당연히 음악을 이렇게 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나중에는 들었어요, 물리학에 접근하는 많은 기술(=공식)을 공부하는 것 그 자체가 내가 음악을 스스로 공부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내가 지니고 있는 물리학적 의식을 음악적으로 실현하는 연습을 했던 것이라고 생각돼요. 수학의 공식이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가능하고, 공식을 발견할 수 있다면, 수학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과 관련되죠. 그래서 많은 물리학자들이 공식을 들여다보면서 이것이 물리적 현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하죠. 그런 관계를 밝혀내는 사람이 위대한 물리학자가 되는 겁니다. 많은 수학자들이 이상한 방정식을 보다가 어느 날 문뜩 (영감을 얻게 되죠) 헌 책방에서 자신이 필요한 참고서적을 찾다가 이상한 수식을 보게 되는 것도 그런 것이죠. 물리학을 하게 된 것이 하나의 숙명이죠.”(1차 대담)

 

3. 청년시절

#보이스 오브 유나이티드(VNC) #서양음악공부

젊은 시절 서양음악을 공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보이스 오브 유나이티드 네이션(VNC)”라고 하는 UN 군 사령부에서 하는 방송이었다. 그 방송 중에 한 채널이 클래식 음악을 하는 것이었는데, 하루 종일 클래식만 나오는 건 아니고 아침 새벽에 2시간, 낮에 2시간, 저녁에 2시간, 한 밤중에 2시간, 이렇게 클래식 음악을 녹음해서 틀어줬다고 한다.

그 당시 이 방송은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통로 중 하나였다. 선생은 젊은 시절 이 방송을 하루도 빠짐없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이 방송이 똑같은 패턴으로 2시간을 반복해서, 그 주기가 한 50일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요즘처럼 매니아 클럽 같은 것도 있어서 친구들끼리 ‘야 이게 몇 가지 레퍼토리로 지나가나 내기해보자. 오늘 나오는 음악, 내일 나오는 음악을 알아맞히면 점심 사기다’ 이러면서 지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오늘 브람스 피아노 콘체르토가 나왔으면 내일은 틀림없이 베토벤 5번 교향곡이 나온다는 식으로 레퍼토리를 다 외우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거기 나오는 음악을 다 외우고 있었다. (민음협 대담)

 

Fact Check : 보이스 오브 유나이티드는 주한미군의 자체적인 라디오 방송프로그램 중 하나이다. 50년대부터 70년대에 이르기까지 주한미군방송은 우리나라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주한미군은 1950년 10월 4일 미국 육군 원수 D.맥아더가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 부대를 따라온 미군 방송요원이 서울에서 첫 전파를 발사한 이래로, 1957년 8월 텔레비전 방송을, 1964년 FM 방송을 시작하였고, 1971년 FM 스테레오 방송을 시작하였다. 프로그램의 대부분은 미국에 있는 미군방송본부(Armed Forces Radio and Television Service)에서 공급되며 뉴스는 직접 통신위성을 통하여 받고 있다. 현재 TV의 경우 하루 19시간, FM·AM은 종일방송을 하고 있는데, 한반도 전역을 가시청 지역으로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주한미군방송 [American Forces Network Korea] (두산백과)

#르네상스 다방, #보이스 오브 유나이티드, #서양음악공부

1960년대 선생의 삶에서 중요한 장소 중 하나가 르네상스 다방이다. 선생의 기억에 의하면, 거기에 아침 10시에 들어가서 음악을 신청하고 듣다가 저녁 10시쯤 나왔다고 한다. 당시 거기에 오는 대부분의 인사들이 하루에 12시간 이상을 거기 앉아 있었다고 한다. 돈도 없고 갈 데도 없었던 당시의 젊은 지식인들은 그렇게 심각한 자태를 취하고 정말 인생의 모든 고난을 겪은 사람들처럼 앉아서 10시간씩 있는 그런 고행을 했다고 한다. 선생은 이런 문화가 서양음악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게 하지 않았나 회상한다.

“그러니까 60년대에서 70년대를 넘어올 당시에는 문화에 대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 아무런 방법이 없었던 것이죠.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음악이란 것은 그냥 들리는 대로 들을 수밖에 없었던 거고요. 음반이란 것도... 우리나라에서 클래식 애호가를 위한 음반이 50장 나왔는데 물론 카피죠. 그것도 굉장히 조야하게 만든 해적판인데, 어쨌든 그런 레퍼토리가 하나 나오면 우리 비슷한 연배들끼리는 그 음악을 다 외웠어요. 그러니까 나중에 ‘르네상스’ 감상실에 있는 음반이 몇 종류나 되는지, 그리고 베토벤 교향곡 연주자는 누구인지 다 아는 거죠. 하여튼 그런 이상한 경험을 했기 때문에 우리가 서양음악을 한다고 얘기하는 것은 무슨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그냥 주어진 사명이라고 얘기해도 될 것 같습니다.“ (1차대담)

 

Fact Check : 르네상스 다방은 박용찬씨에 의해 50년대에 세워졌다가 1987년 문을 닫은 종로 소재 음악감상실. 당시의 유명인들은 거의 이 곳을 드나들며 마음의 안식을 찾았던 곳이다. 우리나라 양악 100년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당시 단돈 20원이면 온종일 음악을 감상했다. ‘르네상스 몇 기냐’ 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한다. 피난시절 대구에 처음 문을 열어 전쟁 속 지식인들의 마음의 위안처가 되었다가 서울 탈환 후 인사동에 문을 열어 6년간 유지하다 종로로 옮겨 운영되었다. 1만장에 가까운 음반을 소유하고 있었고, 현재는 그 중 예술의전당 내 예술자료실에 4961장의 SP와 LP, 647권의 음악서적, 12점의 음향기기가 보관되어 있다. 나운영, 임원식, 윤이상, 강석희, 김영욱 등의 음악가와 화가 박고석, 변종하, 건축가 김중업, 작가 김동리, 정치인 김종필 등 유명인들이 이 곳을 드나들었다. (94년7월1일자 경향신문 기사 내용 요약)

 

#부산, #음악에 대한 갈증, #학림다방

음악대학을 입학한 후 부친의 사업이 실패하게 되어 선생은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다. 음악을 잊고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음악을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마음은 음악 쪽으로 다가가고, 종국에는 배가 고픈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까지 들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를 선생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내가 평생 미칠 것 같다는 느낌을 가져 본 적이 몇 번 밖에 되지 않았는데, 그 때는 정말로 (음악을 하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지. 꿈을 꾸면 내가 음악을 하는 꿈을 꾸었고, 피아노 치는 꿈을 꾸었어. 점점 음악으로 맘이 기울어졌어. 크리스마스 무렵에 남포동에서 매형들과 술을 마시고 수영 앞 바다까지 밤새도록 걸어갔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내가 미쳤던거야. “왜 내가 음악을 할 수 없는가” 너무 화가 나서 걸었던 거지. 걸어서 수영만에 도착하니 막 해가 뜨려고 했지. 차가운 바람 속에서 부는 훈훈한 바람이 불었어. 이상한 느낌이 들더군. 내가 살던 하꼬방에서 군대에서 휴가나온 친구가 밤새도록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그 친구가 공병대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친구 밥 사주겠다고 페인트를 한 통 훔쳐서 나왔다고 하더군. 그렇게 마련한 돈으로 우리들을 설렁탕을 한 그릇씩 사먹고 헤어졌지. 집에 돌아오니 매형들이 서울로 올라가라고 하더군.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았는데, 어머니는 이모네 위층에서 세를 들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서울에 올라와서야 알게 되었지. 고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던 막내 누나가 부모님을 부양하고 있었지. 12월 28, 29일에 서울로 올라왔는데, 피아노를 쳐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새벽에 집 뒤편에 있던 신당동 교회로 갔어. 날씨가 추웠는데도. 피아노를 치고 싶었던 거지. 피아노에 앉아서 그 동안 내가 만든 곡을 쳐보았는데, 음악이 귀에 들어오지 않더라고,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거지. 몇 달 동안 겪은 경험들이 아주 우스웠던 거야. 그 다음 날 길거리에서 모임을 같이하던 여자를 만나서 다과회를 따라가게 되었지. 친한 친구들이었는데 말을 못 붙이고 서먹서먹하게 있다가 떠듬떠듬 겨우 근황을 물어보게 되었지. 그런데 어벙이처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 그러면서 내가 심각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자각하게 되었지. 준혁이로부터 학림 다방 디제이를 해보라는 이야기를 듣고서 이것이 나의 살 길이라고 생각했지. 셋째 매형이 대학로 근처에 사는 친구 분의 사촌조카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가정 교사 자리를 소개해주었지. 하루에 한 시간 씩 피아노를 가르치고, 2시간 정도 연습을 하고, 학림 다방으로 가서 하루를 보내는 날이 시작되었어. 이것이 68년도에 있던 일이야. 그러다가 금난새가 캠프를 가야 한다고 해서 68년도에 캠프를 하게 되었지. 나에게는 하루 아침에 천당을 간 것처럼 여겨졌지. 음악을 할 수 있었으니까. 캠프와 관련된 일도 좀 하고, 편곡도 하면서 베토벤의 로망스를 다 듣고 피아노 곡에 반주 붙여서 편곡하고 연주를 하고, 처음으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를 하게 되어서 황홀한 날들을 보내고 있었지. 일년 전에는 부산에서 꿀꿀이 죽을 먹으면서 보냈는데, 음악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엄청나게 행복했던 거지. 문리대에 적을 두고 왔다 갔다 하고, 학림에 모여서 보냈지. 그 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했으니까. 그것이 68/69년 일이었지. 내가 최초로 곡을 쓴 것이 71년까지 생겨난 여러 계기들을 생각해보면, 저 밑바닥에서부터 물이 차서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지. 이게 드라마야. 67년부터 일어난 사건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났고, 내가 음악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단계적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

그래서 ‘봄’이라는 단어가 70년대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던 단어였지. ‘나에게도 봄이 올 수 있나?’하는 생각이.” (1차대담)

 

# 작곡공부

작곡공부는 거의 독학으로 했는데, 첫 번째 방식은 화성, 선율, 리듬에 대한 전문서적을 선택해서 독파를 하는 것이었다. 미들턴의 책(Middleton, R. (1967), Harmony in modern counterpoint, Allyn and Bacon. 한국어판 1967. 수문당)으로 공부를 했고, 강준혁 선생이 카추사로 근무할 때, 휴스턴 대학을 다니다가 미국 병사로 와서 트럼펫 연주자로 근무하고 있던 사람과 교류했었는데, 그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보내준 최신의 현대적 선율 대위법Modern Modal Counterpoint이라는 책을 읽으며 현대음악을 공부했다고 한다. 그 밖에 음악의 리듬구조(Rhythmic Structure of music (Cooper & Meyer,1960))를 평생 동안 여러 번 새롭게 번역하면서 읽었는데 이런 책들은 연주에 대해 알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기초적인 것들을 알기 위해 그로브 음악 사전 3판 6권을 닥치는 대로 번역하고 이를 빼고 끼울 수 있는 카드에 빼곡이 적어 이게 10권이 넘을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대 물리학과를 다닐 때 중앙도서관에서 1885년 아니면 1905년에 출간된 듯한 대위법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평생동안 열심히 읽었다고 한다. 그것을 통해서 대위법에 관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다른 한 편으론 요즘 나온 대위법 책들이 엉터리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요즘의 대위법 책들은 화성학을 한 사람들이 쓴 책인 것에 반해, 이 책은 선형대위법의 특징을 잘 설명해주고 있었다고 한다. 선형대위법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특징 때문에 온전하게 선형대위법 자체를 설명해주는 책은 거의 없는 편인데, 푹스의 책은 너무 어렵고 옛날 양식이고, 그런 상황에서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일본인들이 들여온 독일어로 된 서적들이 마침 있었기에 공부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1차대담)

 

#전통음악공부 #가락동인회 #최순우 박물관장

1970년대 새마을 운동으로 근대화한답시고 우리 전통문화를 없애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풍물 등은  아주 직접적인 영향을 주니까 풍물은 다 걷어다가 버리고 농악을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되다 보니까 70년대 초반이 되면 지금 인간 문화재급 되시는 지영희 선생님이나 신쾌동 선생님 이런 분들이 거의 밥을 먹고 살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고 한다. 김소희 선생님이나 박귀희 선생님 세대들이 결국은 환갑이나 결혼식장에서 노래 부르셔야 되었고, 때로는 고급 요정에서도 노래를 해야 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던 즈음에 최순우 선생님이라는 우리 전통문화의 대부가 초대 박물관장을 하셨는데 이분이 박물관, 미술관 관련된 분들을 다 규합해서 ‘이러다가 우리 전통음악이나 무속 씨를 말리겠다’하면서, 이 사람들을 위해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락동인회’라는 것을 만들었다. 이 분들에게 돈을 모아드리려는데 그냥 모아드리면 뭐라 그러시니까, 모셔다가 조그만 방에서 연주를 하시라고 하고 그때 돈으로 30~40만 원정도 드렸다고 한다. 지금으로 치면 한 300~400만 원쯤 드린 것이다. 근데 그런 일을 나이 드신 분들이 할 수 없으니까 이름을 적어주시면 젊은 선생과 동료들이 찾아다니면서 선생님들을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고 같이 녹음도 하고 인터뷰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이 선생이 24~25살 때의 이야기인데, 이렇게 본의 아니게 3년 동안 웬만한 분들은 다 만나보게 되었다. 이 일은 선생이 전통음악에 남다른 깊이를 갖게 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Fact Check : 혜곡 최순우 선생(1916~1984)은 초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분으로, 고물을 고미술로 승화시킨 천재라고 불릴 정도로 뛰어난 안목을 가진 박물관장이다. 유홍준은 그를 “도자기, 회화, 건축, 불상, 민예품 등 구체적인 유물을 통하여 한국미의 특질, 나아가서는 한국 미학의 방향을 제시한 희대의 대안목으로 한국미술 5천년전, 조선시대 회화전, 한국민예미술전 등 수많은 특별전을 통하여 한국 미술사의 대맥을 잡아준 미술사가”로 평가한 바 있다.(유홍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778507.html#csidx0b7fe9d988348d8952f8f5b8a0c08b9)

 

#김순남, #아버지, #김광순

선생은 아버지를 통해 작곡가 김순남의 음악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김순남의 가곡집이 발표되던 해에 부친이 책을 사오셔서 혼자 공부를 하고 노래를 부르셨다고 한다. 그래서 5,6살 때부터 이미 김순남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고, 아버지가 노래를 가르쳐 주셔서 ‘진달래꽃’, ‘산유화’, ‘자장가” 2편 등 4곡은 어려서부터 끝까지 알고 있었다고 한다. 부친은 김순남을 최고의 작곡가라고 평가하셨다. 당시에는 김순남의 악보를 가지고 있는 것이 매우 위험한 일이었지만 선생은 그 악보를 소중히 간직했고, 1971년 가곡을 그렇게 좋아하던 김광순 선생에게 줬다고 한다. 1990년 즈음에 이건용 선생이 김순남이라는 사람을 아느냐고 물으며, 본인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며, 선생님들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몹시 분개를 하더라는 기억을 갖고 계셨다. 우리나라 클라리넷 연주의 선구자였던 임춘원 선생(클라리넷티스트 오광호선생의 스승)은 김순남을 최고의 작곡가라고 평가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음악을 하던 사람들의 뇌리에는 김순남이 최고의 작곡가라는 평가가 남아 있었다.

 

#윤이상

1969/70년은 선생이 작곡가로서 뭔가를 시작하던 때였는데, 1969년 경 변종하라는 화가가 프랑스에 있다가 들어오면서 오르프의 <카르미나 부라나>를 가지고 와서 들으러 갔었다고 한다. 거기서 윤이상의 <예악>(1966) 음반을 듣게 되었다. 그 음악을 들으면서 우리나라 음악을 현대 세계로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신기한 음향, 음색, 농현적 요소, 피아노와 플룻을 위한 작품 “가락”의 리듬 등.

 

 

4. SMA (서울음악학회)(1970~현재)

1968년 조직했던 음악캠프를 계기로 1970년 발족된 ‘서울음악학회’(이하 SMA)는 음악대학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서양음악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시대에 자생적으로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해보고자 했던 오케스트라운동이다. 자생적으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배가 공부하고 후배들이 함께 학습하는 학습공동체라는 점에서, 실내악 또는 오케스트라 중심의 음악캠프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68년 서울 음대에서는 금난새씨가 학생회장을 했고 문호근씨가 부회장을 하던 때였다. 그들은  ‘캠프를 하게 해 달라’는 명목으로 휴업을 했는데, 그래서 결국 음악캠프라는 걸 처음 승낙받게 된다.  그 캠프의 전체 계획을 선생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원주 가톨릭 교구에 계시던 지학순 주교가 선뜻 가톨릭 기숙사와 회관을 빌려 주어서 처음 캠프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때 선생은  ‘아, 음악은 그냥 하면 되는구나’ 하는 걸 어쩌면 당연한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꼭 누군가에게 레슨을 받아야만 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음악이라는 건 음악 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하면 되는 거였다. 음악 하는 사람들이 다 모여 있으니까 이렇게 행복한 것이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런데 그 당시는 학생운동은 말할 것도 없고 숨도 크게 못 쉬던 그런 때였다.(1972년부터 유신체제) 70년도에 다시 캠프를 하겠다고 했더니 학교에서 또 안된다고 했다. 그래서 뜻이 맞는 사람들끼리 다시 캠프를 결성하게 됐는데, 그게 지금 ‘서울음악학회(SMA)’라고 하는 것의 시작이 된다. 처음에는 금난새, 임헌정, 김광순 이런 분들이 주도가 되었고 고문으로 이재옥 선생님이 맡아주셨다. 이재옥 선생은 비올리스트로서, 당시 서울대 교수들 중 음악을 가장 제대로 많이 아는 분이었고 귀가 가장 좋았다. 하얼빈 교향악단으로 음악가 활동을 시작하신 분이었고 앙상블에 조예가 깊은 분이었다.

 

#회관시절(1970~1975)

캠프를 시작하고, 캠프 후 일상에서도 계속 연습을 하려니 장소가 없었다. 그러던 중 플륫하는 김성근씨 이모가 갖고 있던 숭신동 건물을 빌려줘서 거기서 회관 생활을 시작했다. 가구는 주워다가 나무판으로 연습실을 만들었다. 제작을 모두 학생들이 했다. 회관에는 자료실과 연습실이 있었고, 회의실, 피아노 2대가 있었다. 강준일선생의 피아노 레슨이 당시 주 수입원이었다. 상주인원 중에는 클라리넷 고광선, 호른 이용진, 지휘 임헌정, 테너 하영일 등이 있었다. 매일 음악에 대한 책을 읽고 토론하고 연습했다. 선생의 책 <음악에로의 입문>은 그 때 공부한 것들이다.

 

선생은 이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상하고 있다.

“‘진짜 뭔가를 해야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한 건물의 3층을 빌려서 8명이 같이 먹고 살았다. 우리가 거기를 고아원이라고 그랬으니까, 그냥 먹고 산 겁니다. 돈도 없고 그러니까 겨우 먹고 살면서, 매일 모여서 ‘우리는 예술을 하자’, ‘그래도 우리는 예술을 해야 되지 않냐?’, ‘우리가 어떻게 하면 예술을 할까’ 이런 얘기를 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의 본질은 ‘결국 우리 스스로 이걸 해결해야 되지 않냐. 그렇다면 우리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이 뭐가 없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그러다가 우리끼리 연주운동도 하고 곡도 써서 발표하고 그러면서 저희가 완전히 서울 음대의 요주의 인물이 되었죠. ‘서울음악학회’하고 ‘음대 연극반’에 가면 졸업이 되냐 안 되냐 할 정도로 학교에서 아주 딱 찍힌 학생들이었어요. 1년이면 꼭 두 세 차례는 우리 때문에 교수회의가 열렸어요. 그런데 나중에 지나 놓고 생각해 보니까, 바로 그런 억압이 저희들에게 참 많은 깨달음을 준 게 사실입니다. 하다못해 ‘SMA는 대남 공작원이 주기적으로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는 소문도 있었어요.  그런데 이런 일을 겪으면서, 사실은 그런 경험이 오히려, 스스로 이런 일을 해결해야 되겠다는 깨달음을 준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나는 어떻게든 음악을 하고 살아야 되겠다’라는 마음의 결정을 하게 되었어요. 음악을 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는 것, 그러니까 일부러 공부를 하기 위해서 외국을 간다던가 하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어떻게든지 음악을 하고 살아야 되겠다’라고 생각을 했어요. 그것에 직접적으로 도움을 준 것이 ‘서울음악학회’에서 같이 일했던 많은 우리 동료들이예요. 저는 정말 그 친구들에게 고맙게 생각하고, 참 이것도 어떤 숙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요.(민음협 대담)”

 

#SMA 캠프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매회 1년에 두 번씩, 여름과 겨울에 SMA 캠프를 열었다. 캠프는 한 해도 쉬지 않고 열렸으며 현재도 SMA 후배들에게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캠프는 아주 빡빡한 일정으로 일주일간 진행되었다. 캠프는 처음부터 그런 의도를 갖고 시작된 것은 아니었지만 40년 동안 이어지면서 양악식 매스터클래스와 국악식 산공부가 결합된 절묘하고 독특한 교육과정의 전통을 만들어내게 되었다. SMA는 40년동안 그런 토종 한국적 사운드를 찾아내기 위한 훈련방식을 만들어왔다. 예를 들어, 캠프는 매일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육태완선생의 ‘수벽치기’라는 체조로 시작한다. 아침을 먹고 나면 커피와 함께 음악감상을 한다. 서울을 떠나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듣는 바흐와 모차르트, 거문고 산조 등은 그동안 일상 속에 잊었던 음악에 대한 나의 첫사랑을 되새기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나면 연습이 시작된다. 연습은 늘상 엄격했고 기본적으로는 연주자 친구들과 선배들과의 끊임없는 토론을 통해 음악을 만드는 과정을 배우는 과정이지만 강준일선생으로부터 음악해석과 서로의 소리를 듣는 방법, 작곡가를 이해하는 법에 대한 많은 지도가 있었다.  점심식사 후 다시 연습, 그리고 오후 강의가 있는데, 오후 강의는 명사를 초청하여 대체로 음악 외의 예술전반, 문화, 철학, 과학 등에 관한 폭넓은 시각을 갖게 했다. 이 때의 강의 주제는 강준혁선생이 그 때마다의 이슈에 맞게 정하셨고 그 주제에 맞는 강사를 섭외했다. 오후 5시경부터는 반드시 ‘명상’시간을 가졌다. 명상은 강준일 선생이 직접 이끄셨는데, 간단한 기체조를 하고 난 후 눈을 감고 복식호흡을 하면서 명상에 들어갔다. 처음 캠프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그 의미를 잘 모른 채 참여하지만, 몇 년이 지나보면 연주자들에게 이 명상이 얼마나 중요한 시간인지 서서히 깨닫게 된다. 음악가들에게는 소리가 없는 시간도 소리가 있는 시간만큼 중요하다. 저녁식사 후 다시 연습이 있고 강의 또는 ‘선배와의 대화’라는 시간이 이어진다. 선배와의 대화는 SMA를 거쳐간 음악하는 선배들이 자신의 삶을 소개하면서 후배들에게 인생상담하는 시간이다. 음악가의 삶을 살기 위해 겪게 되는 구체적인 고민과 해결을 보여주는 시간이기 때문에 어떤 강의보다 더 도움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 모든 하루의 일정이 끝나는 밤 12경에는 하루의 일정을 정리하는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SMA를 통해 이미 음악가로 활동하는 선배들의 자발적인 지도도 매년 이어졌다. 참여하는 학생, 교사가 모두 회비를 내고 참가하는 캠프였고 간식담당, 총무, 기상담당 등 전체를 위해 희생하는 친구들이 항상 있었다. 그들도 역시 돈을 내고 참가한다. 개인이 모여 어떻게 전체가 되고 어떻게 해야 가장 아름답고 완벽한 전체 사운드를 만들어내는지 배우고 체험하게 되는 구조를 갖고 있다. 그래서 캠프의 마지막은 항상 종교행사의 마지막 장면같은 상황이 만들어졌다. 괜히 인생이 반성되고 착하게 살아야겠다고 결심하게 되고 나의 게으름이 속상하고 음악을 더 잘하고 싶은 욕망이 생기고 친구들을 더 사랑하게 되고... 뭐 이런... 감상이 저절로 생겨나게 되어서, 외부에서 잠깐 오거나 남을 통해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SMA를 이상한 종교집단처럼 생각할 소지가 충분했다.

같은 베토벤을 연주하더라도 그 사운드는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 독일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사운드가 있고, 남미오케스트라는 또 그들만의 사운드가 있다. SMA는 40년동안 그런 토종 한국적 사운드를 찾아내기 위한 훈련방식을 만들어왔다. 이것은 후에 선생의 ‘명상적 보잉’이라는 독특한 현악 연습방법과 안동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한 ‘아시아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에서 가시화되어 나타났다.

 

선생은 2015년 인터뷰에서 SMA캠프에 대한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SMA라고 하는 단체를 사십 몇 년을 해왔는데, 그걸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어요. 그냥 선생님이 없으니까. 우리끼리 모여서 그냥 학구적으로 우리끼리 공부를 해서 음악을 해보자, 그래서 서울뮤지션스아카데미라고 아카데미라는 이름을 붙인거에요. 그렇게 시작을 해서 사십 몇 년 째 캠프를 첫 몇 년은 여름만 하다가 여름 겨울 이렇게 하는데 우리 캠프의 특징은 모든 전공이 다 같이 하는 거에요. 지금은 어떻게 됐냐면 거의 공동체처럼 작곡하는 아이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연주하는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고 공부하고 그래요. 한 십년 전까지만 해도 20대 중반이 되면 다 외국을 갔는데, 지금 30대에 들어간 아이들은 외국을 안 가고 음악과 생활을 이어가고 있어요. 작곡하는 애들이 뭘 써주면 연주하는 애들이 같이 연주하면서 공부도 같이 하고 이 단계까지 왔어요. 여기까지는 성공을 한 거야.” (2차대담)

 

5. 오케스트라 운동

회관에서의 생활이나 초기 SMA 의 활동은 오케스트라 운동 또는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려는 것이었다.

1973년 경에 SMA가 TBC방송에서 한 ‘노래의 날개위에’라는 프로그램 반주를 맡게 되었는데, 그 때 지휘자, 편곡자, 기획자 역할을 선생이 9개월 쯤 하게 되었다. 매주. 수요일쯤 연락이 오면 금요일에 녹화를 해야 했고, 그 사이에 편곡을 해야 했다. 그 덕에 편곡을 무지하게 많이 하게 되었다. 당시에는 악보가 없었기 때문에 귀로 들어서 악보를 따서 편곡하는 것이었다. 하이든 <바이올린 협주곡>, 훔멜의 <트럼펫 협주곡>, 비발디 <플루트 협주곡>, 모차르트의 <바이올린협주곡>, 슈타미츠 <비올라 협주곡>, 베토벤 <로망스>, 오페라 아리아 등을 귀로 듣고 편곡했다. 그러다가 75년도에는 성음사라는 레코드 회사에서 한국 가곡집 시리즈를 내는데 SMA가 60곡정도 녹음하게 되었다. 그 때도 대다수 편곡을 맡아서 했는데, 편곡 자체가 실습이 되었다. 그래서 교향악단에서 소문이 나서 중요한 편곡을 맡게 되었고, 이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마당>을 작곡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일은 SMA라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6. SMA 후원회

SMA 캠프는 원주 지학순 주교가 카톨릭 기숙사를 자유롭게 쓰도록 해줌으로써 가능했다. 한편 SMA는 원주에서 진광중학교 밴드부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당시 원주의 정신적 대부였던 장일순(동생), 장화순교장선생님(형) 형제가 SMA를 정신적으로 후원했다 할 수 있다. SMA는 처음부터 이런 후원회가 있었다. 예를 들면, 동부그룹 김태욱사장, 주강수선생(강준일 선생과 서울고 절친)이 캠프때마다 간식을 가지고 와주셨다. 그런 분 들 중에는 김재익(1938-1983) 전 경제수석(마당 초연 때 왔었다, 부인은 큰누님과 친분), 김대을, 최영천(영화제작), 김소선(후원회 중심인물), 성인숙(한국일보 기자), 미술계의 최욱경 화가, 당시 운당여관의 박귀희 선생 등이 있다.

 

Fact check : 운당여관은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에 있었던 양반가옥이다. 운당의 기원은 조선 후기 궁중의 내관이 순조로부터 재목을 하사받아 지어진 양반가옥이었다. 이후 이 집은 몇차례 주인이 바뀌게 되었는데 1951년 가야금병창 예능보유자인 박귀희(본명 오주화)가 박흥식의 조카인 박병교로 부터 이 집을 인수하였다. 여기다 구한말 세도가 였던 한상억의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집의 이름을 운당(雲堂)이라 짓고 여관으로 운영하였다. 이후 1960년 정릉에 있던 윤비(순종의 비)의 별장도 이전하여 복원하면서 31개 객실의 여관으로 더욱 확장하였다. 운당의 가옥 구조는 서울과 경기지방의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고 있다. 문간채와 사랑채, 안채, 곡간채, 행랑채, 별당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각은 협문으로 이동하게 되어있다.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졌고 1959년 한국 바둑의 최고봉인 국수전이 이곳에서 열리면서 바둑의 명대국장으로도 알려졌다. 운당은 1989년 2월까지 종로구 운니동 65-1번지에 있었으며 현재 운당의 일부가 경기도 남양주 종합촬영소에 이전 복원되어 있으며 운당이 헐린 자리에는 세원 오피스텔이 들어서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운당 [雲堂] (두산백과)

 

7. 음악적 동료들

강준일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음악이란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럴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분이다. 그 깨달음은 그의 작업이 끊임없이 주변 연주가들과의 교류와 관계 속에서 생산되게 하고, 정릉집과 여주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을 수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통로로 만들었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음악 선생으로서, 예술적 동지로서 그의 삶을 지탱해 온 힘이었으며 40여년간 캠프를 지속해 온 원동력이었다.

수많은 명사들이 그와의 작업과 혹은 SMA 캠프와 함께 했다. 그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작곡가 : 이건용, 황성호, 유병은, 김광순, 이돈웅

예술기획 : 강준혁, 강준택, 하영일, 김흥수, 오병권

음향 엔지니어 : 장경철

팝 칼럼니스트 : 서남준

 

지휘자 : 금난새, 임헌정, 정치용, 강석희

바이올린 연주자 : 김영준, 박우숙, 백낙성, 백낙화. 어광령. 조형남. 이동희

첼로 연주자 : 도완녀

비올라 연주자 : 이나옥, 강창우, 김순원

플륫 연주자 : 김성근

오보에 연주자 : 신상호

클라리넷 연주자 : 오광호, 고광설, 김현곤

트럼펫 연주자 : 석필원, 김길수, 김석원

트롬본 연주자 : 임성환

호른 연주자 : 이용진

소프라노 : 김경희

테너 : 김무중, 하영일

바리톤 : 남의천

피아노 : 유명숙

 

사물놀이 : 징 최종실, 쇠 김용배, 강민석, 장고 김덕수, 북 이광수

명창 : 김소희, 신영희, 안숙선

 

해금 : 김영재, 정수년

가야금 : 성금련

공간사랑 : 문광인 김욱진

 

8. 강준혁

강준혁선생은 막내인 강준택선생과 함께 전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강준혁선생은 그 자신 클라리넷 연주자로서 SMA 캠프의 공동 주관자로서 선생의 음악적 인생의 시작부터 함께 했으며, 소극장 공간사랑을 통해 ‘무대음악을 위한 전시회’, ‘울타리굿’ 등 많은 음악적·예술적 실험을 함께 했다. 그 후에도 강준혁선생이 이끄는 예술기획 메타의 임진각 평화축전(2005), 전주 소리축제, 몽골 나담축제(2008~2010) 등 여러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신문기사

한국 문화기획 1세대 강준혁(사진) 선생이 17일 새벽 지병으로 별세했다. 67세.

 1977년 개관한 소극장 공간사랑 극장장으로 일하며 판소리와 사물놀이, 현대 무용과 재즈 무대 등 전통과 현대예술을 아우른 공연을 기획한 선구자로 꼽힌다. '문화는 의도적으로 조직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창조로 이어지는 실험정신, 미래에 대한 투자인 공익정신을 뼈대 삼아 한국 문화사에 남는 굵직한 판을 벌였다.

 음악애호가 집안에서 태어나 서울대 문리대 미학과를 졸업한 고인은 대학 시절부터 음악을 비롯한 연극·국악·무속·무용 등 예술 전반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감수성을 갖춘 르네상스적 인간으로 불렸다. 고인이 89년 창설한 춘천인형극제는 지역축제의 효시였다.

(JTBC 뉴스 [삶과 추억] 강준혁 전 공간사랑 극장장 별세, [중앙일보] 입력 2014-08-18 01:20)

 

9. 공간사랑(1977~1992)

1975년이 되면 회관이 없어져서 모임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졌다. 장소를 두어 번 옮겨가며 있다가 여건이 나빠지기도 했고, 당시 생각하기를 오케스트라 운동을 하는 건 너무 소모적이라 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또 초창기 창단 멤버들이 직업을 갖거나 오광호, 임헌정 등이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활동이 소극적이 되어갈 때 쯤, 1977년 강준혁 선생님이 공간사랑의 극장장으로 가게 되었다. 학림 다방, 세실 극장 그리고 공간 사랑으로 한국 문화가 절묘하게 이어져가는 느낌이 든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공간사랑은 우리 전통문화를 중흥 시켜야겠다고 해서, 당시 남아있던 굿, 농악 이런 것을 모두 무대 위에 올렸다. 처음으로 굿이 무대 위로 올라간 것이다. 사물놀이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 지금 많이 알려진 공옥진이나 이매방 이런 분들이 다 강준혁선생의 손에 의해서, 퍼포밍 아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자신을 둘러싼 삶의 여러 장면 중 이 경우는 확실히 숙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주변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어쩔 수 없이 나도 거기에 참여할 수 밖에 없는 상황 – 마치 미리 정해져 있던 것처럼. 안숙선 선생이나 김덕수 선생이 다 30대도 안된 나이, 서로 모여가지고 우리나라의 이 좋은 전통음악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하면서 막걸리 마시고 신세타령하면서 어울리던 그런 장면을 선생이 함께 경험하게 된 거다. 그런데 80년대에 전두환 정권이 들어서면서 ‘국풍’이라는 운동이 일어나는데, 그건 상징적으로 민속음악, 그 때까지 억압 받던 민속음악을 풀겠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전두환 정권이 들어오면서 당시 그러한 정책을 주도했던 허문도라는 분이 상징적으로 사물놀이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하여 그걸 정책적으로 내세우게 된다. 그러면서 김덕수 패가 갑자기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의해 스타의 대열에 올라서게 되고, 어느 사이 민속음악이라는 것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라는 그런 상황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공간사랑에 대해서는 다음 신문기사를 참고하라.

신문기사

김수근문화재단(이사장 박기태·오른쪽)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예술자료원(원장 정철·왼쪽)에 소극장 ‘공간사랑’ 관련 사진자료 3763점을 기증했다.

공간사랑은 서울 계동 공간사옥 지하에 자리잡은 100석 규모의 박스형 소극장으로 고정된 객석 대신 4가지 종류의 나무상자 680개를 이용해 객석과 무대를 자유자재로 변형한 창조적 공간이었다.

1977년 4월 개관해 92년 유진규의 판토마임을 끝으로 문을 닫기까지 4180여 회의 공연을 했다. 고 강준혁 선생의 기획으로 ‘전통예술의 밤’을 통해 김덕수, 김용배, 이광수, 최종실로 구성된 ‘사물놀이’ ‘공옥진 1인 창무극’이 시작된 공간이기도 하다.

기증 자료는 공간사랑 개관 공연 ‘상자 속의 사랑 이야기’를 비롯해 이곳에서 열린 희극제, 추리극 시리즈, 모노드라마 시리즈, 마임 페스티벌, 실내악의 밤, 민요의 밤, 발레의 밤, 전통예술의 밤, 공간무용의 밤, 공간 춤판, 공간예술제 등의 사진과 개관식, 좌담회, 교육, 각종 문화 행사 등이 포함됐다.

원문보기

 

공간사랑에 대한 선생의 기억은 다음과 같다.

“공간사랑의 활동은 시야가 우리 끼리의 예술이 아니라 사회적인 활동으로 바뀌어졌다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우리와 비슷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 강태환, 김덕수 사물놀이 팀 등 새로운 연주자들과 부닥치고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해야 되는지를 서서히 깨닫게 되었다. 당시 제일 관심 있었던 것은 무용음악이었다. 그 영향은 틀림없이 스트라빈스키나 드뷔시의 음악이 저변에 깔려 있었을 것이다. 공간에 가면 현대무용이나 한국춤, 무속 등을 만날 수 있었다. 그것이 커다란 희망이기도 하고 가능성을 찾는 계기였다. 80년도 쯤 공간사랑에서 매월 마지막 주에 각 예술 장르의 발표회를 시리즈로 개최했다. 예를 들어 월요일은 고전음악, 화요일은 재즈 식으로 일주일 내내 춤, 시나위 등을 했는데, 그러면서 각 장르와 만나게 되었다. 그 중에서 제일 먼저 같이 일을 하게 된 것은 김복희·김화숙 무용단이었다.” (1차대담)

 

10. <무영탑>(1975)

젊은 시절, 아직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던 때(74년경), 숙대 교수였던 무용가 송수남 씨가 숙대 학생들을 데리고 공연을 했었다. 그녀의 남편이 국회 문공위 위원이었던 덕분에 국립극장을 빌려서 무용 발표회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동덕여대 미술과 교수였던 이화수가 대본을 쓰고, 나에게는 음악을 써달라는 의뢰를 했다. 그래서 내가 1, 3막을 하고,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서 경희대에서 작곡 공부를 한 한성석이라는 작곡가가 4막, 진규영이 2막을 맡게 되었다. 한 막이 20분씩이니까 1시간 반 정도 되는 상당한 대곡이었다. 무용단도 한 50명쯤 동원되는 큰 규모였다. 나는 2막이니까 20분씩 약 40분 분량의 곡을 쓰면서, 그 정도의 오케스트라곡을 써보니 이것이 엄청난 작업이란 걸 깨달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한국 춤 추는 사람들이 서양 오케스트라에 맞춰서 하는 일이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장단으로 음악을 손보아야만 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무영탑>(1975) 작업을 하면서 무대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서 <봄>(1976) 작품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11. 스트라빈스키 같은 무대음악작곡가

#발레모음곡 <봄>(1976)

<봄>(1976)은 선화예고에 무용을 가르치러 와 있던 댈러스라는 사람이 발레단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 분이 발레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발레의 기본 에튀드 모음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이것은 나에게는 일종의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선생이 나는 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고 하자, 발레 음악에 대한 교본과 책들을 빌려주면서 격려를 해주었다. 얼마 후 그 분은 구성 노트를 만들어서 가져왔다. 시간과 에너지의 분포를 나타내는 표였다. 일종의 그래프였다. 그 분은 나에게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분배하는 것이 무대에서는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동작 뒤에는 충분한 휴식 시간을 주고, 커다란 도약을 하기 전에는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주어야만 한다는 것, 절정에서 도약을 해야만 한다는 것, 솔로에서는 아라베스크로 끝이 나야만 한다는 것 등을 가르쳐주었다. 발레의 기본 지식을 열심히 설명해주었고, 그에 맞추어서 음악이 어떻게 구성되어야만 하는지를 설명해주었다. 그래서 <봄>(1976)이 나올 수 있었다. 연습을 했고, 원래는 피아노를 위해서 쓴 곡을 그들의 발레에 맞게 고쳐서 공연을 했다. 그것을 오케스트라로 녹음을 해서, 공연했는데, 그것이 내가 작곡한 두 번째 커다란 공연이었다. 그 당시에 나의 꿈은 스트라빈스키 같은 무용음악을 작곡하는 음악가가 되는 거였다.

 

12. 무대음악을 위한 전시회(1977~1985)

강준혁 선생이 일하던 공간 사랑에서 무대 음악을 위한 전시회라는 이름의 공연이 3개월에 걸쳐서 매 달 한 번씩 열렸는데, 무대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음악회에 와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음악을 사가거나 이용하도록 만들려는 것이 원래의 의도였다. 이돈웅, 임헌정 등의 음악이 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선생의 작품 중 <춤의 유희>(1977), 비올라 독주곡 <짓>(1985), 첼로, 비올라, 피아노를 위한 <소리>(1982) 등이 이 기획을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13. 사물놀이

사물놀이는 공간사랑을 통해 1978년부터 시작되었다. 첫 사물놀이 구성원은 김덕수, 김용배, 최종석, 최태현이었다. 선생의 초창기 대표작인 <마당>, <푸리> 등이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14. 김복희무용단

#<만가>(1982)

#<슬픈 영혼을 위한 서시>(1992)

김복희/김화순 무용단이 공연을 하기 위해서 미국을 갔는데 공연 도중에 김복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중도에 급히 귀국을 해야만 했는데, 공황에서 전화로 어머니를 위한 곡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화를 받는 동안 머리 속으로 음악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 <만가>(1982)였다. 만가는 죽은 사람을 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대략적으로 처음에 목탁 소리가 들리고, 이것이 끝나면 중간에서 무당이 천수제를 올려주고, 중간에 단 한 곡의 노래가 불려지고는 마지막에 상여가 들려나가는 장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곡은 대략 한 달 정도 걸렸는데, 머리 속에서 곡이 술술 풀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 곡과 <슬픈 영혼을 위한 서시>(1992) 같은 음악은 머릿 속에 음악이 막 가는 것처럼, 무당이 신 내림을 받아서 굿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졌던 곡이다. 스케치도 별로 없고, 음악이 머릿 속에서 그대로 나왔다. <슬픈 영혼의 서시>는 그 다음 과정이다. 즉, 영혼이 자신의 육체를 떠나면서 영혼과 육체의 일종의 대화 같은 거다. 자기 영혼이 자기의 길을 가면서 지금 있었던 삶의 영과 하는 대화 같은 거다. 시를 먼저 쓰고 음악을 나중에 썼는데, 머리 속에서 시가 쏟아져 나왔다. 이런 것이 영감을 받아서 곡을 쓰는 것이지 싶었다. 노래와 일종의 무속이 결합된 일종의 굿을 하는 과정이 아닐까 싶었다. 그런 점에서 특별한 곡이다. 이 곡은 무용곡으로 썼다. 김복희 선생과 10곡 정도를 같이 했다. 그 사람도 그 당시 40대였고, 나도 그랬다. 김복희와 김화숙 선생이 한 20년 함께 작업을 하다가 개인적인 일들이 생기고 하면서 나중에는 김복희 현대무용단이 되었다.

 

15. 평생의 음악을 위한 주제

#만가(1982), #마당(1983), #푸리(1983), #열마당 열두거리(1983), #풍물굿(1986)

일전에도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만, 내가 중앙시장 고물상에서 종이 같은 것들을 사가지고 와서 무슨 음악을 쓸까 고민하고 있었을 때, 김복희 선생이 어머니를 위한 진혼제 비슷한 공연을 하고 싶다는 소리를 듣게 되었고, 그 소리를 듣자마자 머리 속에서 실이 술술 풀려 나오는 것처럼 음악이 나오더라고,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82/83년에 쓴 <만가>(1982) 등의 작품들이 내가 할 평생의 음악을 위한 주제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만가>의 특징은 상당히 선적이야.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음악이 단 하나의 선을 타고 계속 지나가지요. 내 자신도 왜 이 음악이 우리들에게 감정적으로 호소를 하는지는 자문을 해봅니다. 그런데 <마당>(1983)은 굉장히 리듬이 풍부하고, 입체적이고 그 리듬이 점점 발전해서 무엇인가를 향해서 가는 듯한 느낌이 들지요. <푸리>(1983)는 가능하면 장단이 갖고 있는 즐거움과 맛을 살려내려고 신경을 쓰면서 만든 작품이고, <열두거리>(1983)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음식을 다 먹고 난 다음에 후식을 먹는 것처럼 썼어요. <푸리>를 쓰느라고 두 달 동안 혼미한 정신에 빠져 있었지요. 대한민국 무용제에 낼 무용 곡을 제출해야만 했었기 때문이었죠. 몸은 피곤에 젖어 있었고, 도당굿에 완전히 미쳐 있었어요. 구히서 선생이 10간 12지라는 우리의 상징을 살려야한다고 주장을 해서, 내가 열 마당과 열 두 거리를 기본으로 해서 작곡해보겠다고 했지요. 그래서 <풍물굿>(1986)은 열 마당을 기본으로 해서 쓴 것이고, <열두거리>는 열두거리를 기본으로 해서 쓴 작품입니다. 나중에 생각해보니 단순한 동기를 순수한 기악곡으로 만든 것이지요. 굿 음악의 단순한 모티브만을 빼내서 양식화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풍물굿>은 두 가지 요소 <만가>와 <열두거리>의 두 요소를 다 사용해서 만든 것입니다. 끈적끈적한 선적 특성과 장단의 패턴을 사용해서. 마당극에서 보여준 단순한 리듬 패턴이 아니라, 농악 장단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장단 속에서 우리의 정서를 집어 놓으려고 했습니다. 오로지 예술을 해야겠다는 마음에서, 뼈를 깎는 듯한 심정으로 일을 했었죠. 미친 사람처럼 잠도 자지 않고서 만든 작품이었기 때문에, 4,5년 동안은 이 작품에 대해서 잘 쓴 것인지 못 쓴 것인지를 말하기도 어려웠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대해서도 무덤덤했지요.(1차대담)

 

16. 내가 찾는 소리

민족음악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냐 하는 질문을 받을 때 어떤 생각이 드는가 하면요. 예를 들어 내가 충청도 사람이면 충청도 말의 억양과 충청도 식의 문화 관념을 가지고 사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어요? 남들이 그게 사투리다 뭐다 얘기하는 것과 전혀 관계없이 그게 바로 나의 모습이란 말이죠. 한 나라의 음악이나 문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돼요. 그런데 민족음악이라는 게 어떤 의미가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을 만나면 저는 절벽에 서 있는 것 같은 그런 생각을 갖게 됩니다. 마치 남 얘기 하듯이 자기 얘기는 빼고 '너 민족음악 하냐?' 이렇게 이상한 눈으로 날 쳐다본단 말이죠. 내가 생각하기에, 나에게 있어 민족음악이라는 것은 그냥 내가 해야 할 음악, 내가 하고 싶어 하는 음악의 의미와 본질이 무엇일까를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나온 답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 시작은 여러 가지겠죠. 저희는 여러분들과 조금 다른 시대에 살았는데, 농경사회의 맨 마지막 끝 장면을 경험했어요. 적어도 내가 한 10대 중반, 아니 대학을 들어갈 때까지도 우리 아버지 고향에 가면 아직도 농경사회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그 풍습과 문화에 상당히 적응하려고 애를 쓰고 살다가, 갑자기 변하는 시대를 후반에 살게 되었죠.

내가 원하는 소리라는 것이, 혹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와 관계가 있는 걸까? 사실 제가 이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여러분들에게 설명이 될 만한 소품을 들고 왔습니다.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시며) 말로 하는 것보다 들려주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종(鐘)이에요. (첫 번째 종을 치면서) 이건 소 방울로 쓰기도 했었고, 사립문에다 걸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종을 치면서) 이건 주로 사립문 같은데 걸었고요, (세 번째 종을 치면서) 이건 그 성질(quality) 면에서 조금 의문이 드는데, 진짜 우리나라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제가 서양종을 안 가져와서 비교하는 데 조금 문제는 있지만, 이 소리를 들었을 때 분명히 이런 게 우리한테 맞는 뭔가가, 정서가 있는 거예요. (피아노를 치면서) 이게 ‘시’하고 ‘파’에요. 증 4도죠? 만약에 이걸 완전 5도로 치면 이렇게 되죠. 서양 사람들이 원하는 소리는 이런 것이거든요. 완전한 것.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이 증 4도가 이 종소리와 동질감이 있는지, 아니면 완전 5도와 동질감이 있는지. 분명히 이 이상하게 들리는 증 4도가 이 종소리하고 더 맞지 않아요? (두번쨰 종을 치면서) 이것은 우리가 좋아하는 피치 a에 가까운 소리인데, (피아노를 치면서) 그런데 얘는 완전 5도가 아니라 오히려 4도에서 약간 벗어난 소리와 더 비슷하죠? 제가 어느 날 이런 소리들을 들으면서, 어느 음과 어느 음을 합쳤을 때 이 소리들과 더 비슷할까라는 색깔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어요. 이게 단순히 3화음은 아니죠. 아마 귀가 나쁘신 분도 금방 알아들으실 거예요.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면 어렸을 떄부터 (<학교종이 땡땡땡>을 피아노로 치면서) 이런 음악을 배웁니다. 비극이죠. 왜냐하면 원래 우리에게 둘러싸인 소리, 우리가 듣고 살던 소리는 자연음에 가까운 그런 소리였는데, 갑자기 이런 정화된 노래를 듣게 되는 거예요. 어렸을 떄 당연히 저건 천상의 소리니까, 하느님이 만든 소리니까, ‘아, 아름답다’ 이러지만, 분명히 우리 한 쪽에는 그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단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왜 3화음 위에 음악을 쓸려고 할까? 그건 그렇게 교육을 받아서 그런 거고, 우리의 주변과는 전혀 무관한 걸 하고 있었던 거란 말이에요. 옛날에는 중앙 시장에 가면 이런 고물을 파는 데가 많았어요. 제가 어느 날 돈을 조금 가지고 가서 막 별 걸 다 샀죠. 옛날에는 쌌으니까요. 이런 걸 잔뜩 사들고 와서, 내가 이런 소리를 정말 연구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정말로 음향을 연구해 보고 놀라 자빠진 거죠. ‘아, 내가 이때까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소리를 내라고 해야 되는데 왜 나는 도미솔 이런 것을 하고 있었지? 정신이 나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겁니다. 나중에는 왜 우리 민족이 이런 것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해서도 이론적으로 입증할 수 있게 되었어요. 그건 어떤 음향관계이기도 하고, 소위 말해서 우리가 얘기하는 상생 상극이라는, 상생하기 위해서 이 음향이 부딪혀야 된다는 것과 관련이 됩니다. 그래서 증 4도와 완전 5도가 공존하는 거고, 이런 소리가 있어야 소리가 서로 부딪쳐가며 멀리 가는 거죠. 우리나라 종은 은은하게 멀리 갑니다. 서양종은 가까이서는 큰데 멀리 떨어지면 잘 안 들려요. 소리가 너무 하모닉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소리 안에 들어가면 금방 녹아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소리라고 하는 것의 본질은 내가 경험하고 있는 것의 실제나 현실과 달랐고, 내가 그걸 판단하는 데 있어서 굉장히 많은 걸 착각하고 있었구나 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장구나 징 같은 것도 그런데, 노인 분들한테 여쭤보면 장구를 꼭 완전 5도가 아니라 이상하게 맞춘단 말이에요. 그래서 ‘왜 음정을 꼭 낮춰야 됩니까?’ 물어보면 ‘이래야 소리가 잘 어울리고 좋잖아?’ 그러셔요.  이게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거란 말이죠.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징소리가 흔들리면서 ‘더어엉~’ 이러고 가죠? 오뉴월에 황소가 우는 소리 같아야 된다고 하는데, ‘음~’ 이렇게 가는 게 아니라 ‘음~머어~’ 이렇게 갑니다. 세상에 흔들리지 않는 소리는 없죠. 사실은 흔들려야 오래 가는 거예요. ‘차렷’ 이런 것은 일제 시대 얘기죠. 태권도 보시면 알죠? 원래 우리나라 택견은 이렇게 흔들고 있어야지, 가만히 있으면 오래 버틸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소리라는 것도 정제를 해놓으면 멀리 가지도 않고, 오래 울리지도 않고 그러는 거죠. 제가 사물놀이 협주곡 <마당>(1983)을 쓸 때는 그런 걸 처음 깨달을 때였습니다. 정말 내가 그동안 미련한 짓을 했다는 걸 깨달았고, 정말 이 두 개의 소리를 어울리게 하려면 어떻게든지 소리가 흔들리게 해야 되겠다 생각했어요. 이 음악의 맨 처음을 보면 ‘시-도’ 이렇게 시작되는데, 이게 징소리일 수도 있고, 농현일 수도 있고, 시김새일 수도 있는, 그러니까 이 음악의 시작은 제게는 상징적으로 ‘살아있는 소리의 흔들림’을 음악으로 만든 것이고, 이게 사물이라고 하는 소리와 만나서 하나의 소리를 만들어야 되겠다는 거겠죠. 당연히 이 음악을 만들 때 제일 고민이 되었던 건, 어떻게 소리와 소리를 서로 융화시킬 건가, 그리고 어떻게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받아들여 줄 것인가 그런 거였어요. (민음협 대담)

 

17. 농촌의 정서

#마당(1983)

마당은 농악 장단으로 되어 있는데 농악 장단이 갖고 있는 어떤 그 특색이 있어요.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농촌의 그 느낌을 사실 그대로 다 갖고 있는 곡이에요. 첫 번 곡은 오채질굿이 나오는데 봄에 마을 건너편 저 끝 새까맣게 먼 논에서부터 풍물을 치면서 와요. 그러면 괜히 사람들이 봄이라고 생각하는 들뜬 마음이 있다고, 그냥 농사가 문제가 아니라, “야, 드디어 이제 봄이 오나보다.” 그런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풍년굿이라고 해서 추수할 때 사람들이 추는 굿거리인데 굿거리를 굉장히 단순화 시킨거야. 그걸 탁하면 막 그냥 춤이 나오는거지 너무 기뻐서. 내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지금 아이들은 그 정서에 대한 공감이 당연히 없겠죠. 두 번째 악장의 경우는 ‘잔칫날’이라고 제목을 붙인 건데, 우리 설날이나 추석날 보면 친척들이 찾아오고, 산을 찾아가고 뭔가 어린아이들은 기대 속에 부풀어 있잖아요. 그런 날 아침 풍경부터 저녁까지 마지막에 술이 얼큰히 취해서 하루가 저물어 가는 그런 장면까지. 그 다음에 마지막 장은 장날을 이야기하는 거지요. 그 옛날 장터라는 것은 시골 사람들의 나들이 그거 아니에요? 우리 고향에는 장날에 가면 아주 유명한 개장국 집이 있었어요. 개장국은 하여튼 충청남도에서 제일 유명했어요. 그래서 노인 양반들이 저기 가서 누가 날 개장국 하나 안 사주나 이렇게 두리번 두리번 하다가, 누굴 만나면 그 덕분에 얻어먹던지, 아니면 누구더러 사달라고 막 조르든지, 어린 아이들도 어른들 따라 딸랑딸랑 가면, 아 오늘은 뭘 먹게 될까 기대에 부출고, 그렇게 가면 거기서 무슨 엿 장사도 보고, 약 파는 사람도 보고, 술 먹고 춤추는 노인네들도 보고. 이렇게 장날 하루를 보내는 것이거든요. 이게 보통 우리가 얘기하는 농촌의 풍경이죠. 내가 그런 농촌에 살지 않았더라면 그런 서정이 남아 있을 리 없잖아요?

 

17. #<마당>(1983) #범세대 음악회(1983)

83년 막내 동생, 강준택이 시립 교향악단에 공연기획관으로 들어갔죠. 오늘날 용어를 하자만 일종의 공식 매니저였던 셈이지요. 강준택이 교향악단을 찾아가서 민속음악을 해야만 악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설득을 했지요. 그래서 범세대 연주회를 기획하자고 했고, 시립 교향악단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해서 곡을 쓰게 되었어요. 음악회가 4,5회 정도 지속되었지요. 강준혁의 아이디어로 사물놀이를 공연하기로 했지만, 어떻게 올릴까에 대해서는 별로 좋은 생각들이 없었지요. 사물놀이가 들어가는 협주곡을 만들어 달라고 동생들이 간청을 해서 시작을 하기로 했지요. 그 때가 1월 10일이었는데, 2월 20일 정도까지는 완성을 해야만 한다고 했어요. 그 사이에 속리산에서 열리는 캠프를 들어가야만 했었고요. 실제로 작곡을 할 수 있었던 시간은 11일뿐이었어요. 김덕수 패들과 만나서 장단 정리에 대해서 협의를 하기 위해서 3일 정도 함께 일을 했었죠. 네 사람이 다 저마다 장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김용배가 장단에 대해서 가장 간략하고 정확하게 설명을 했지요. 김덕수는 장단을 장구로 배운 사람이어서, 장구로 배운 사람은 (일단 장단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끝이 안 난다는 속설을 그대로 증명했고, 김용배는 징 가락을 알고 있어서 그랬는지 아주 간단 명료했지요. 농악 가락을 녹음해 두었던 테이프를 밤낮으로 들었습니다. 설악산(속리산?) 캠프에까지 가져가서 반복적으로 듣고서 장단을 익혔지요. 그 바람에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고, 캠프에서 돌아와서 열 하루 동안 쉬지 않고 작업을 했는데, 강준택은 매일 아침 출근을 하면 전화를 해서 작업 진척에 대해서 물어보았지요. 강준택은 저녁을 먹을 때쯤 집으로 와서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연필 초고를 넘겨주면 악보에 그것을 정서해야만 했으니까요. 하루 정도는 안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곡을 쓰고 있는 작곡가에게 무언의 압력을 가하는 꼴이니까. 그렇게 정리된 악보를 서울 시립 교향악단에서 사보계를 담당하는 이석희에게 넘겼지요.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어요. 사물놀이 하는 사람들이 악보를 볼 줄 모른다는 거지요. 연습할 때 피아노를 쳐주면 김덕수가 장단을 맞추고, 다른 사람들이 장단을 맟추는 식으로 연습을 계속했지요. 연습을 하는 것을 보러 갈 자신이 없어서 후배 하영일을 연습장으로 대신 보냈어요. 그럴 수만 있다면,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굴뚝같았지요. 연습이 끝난 지 한 시간 후에 영일이로부터 전화가 와서 잘 되었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서 안심을 하게 되었지요. 그리고 다음 연습에 가보았는데, 지휘자 정재동 선생이 사물놀이 패가 악보를 보지 못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화를 내서, 정재동 선생을 달래고 달랬어요. 그리고는 연습을 계속 할 수 있었지요. 강준택이 선전을 잘했는지 초연 날 많은 사람들이 왔고, 커튼 콜을 5번씩이나 받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어요. 지휘자를 포함한 모든 단원들이 몹시 좋아했지요. 서울 시향이 창작곡을 연주하고도 칭찬을 받은 것이 이번이 처음이라고들 했지요.

 

그 다음 곡이 <난파 회상>인데요, 홍난파를 기념하는 작품을 세 가지 스타일로 썼던 것입니다. 홍난파 작품 속에 들어 있는 철학적인 것, 동양적이지만 인상주의적인 것, 민속적인 요소를 주제로 삼아서 작품을 썼습니다. 1악장 “봉선화” 주제가, 2악장 “봄처녀”, 3악장 “금강에 살어리랏다”로 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곡을 만들었지요. 그리고 이돈웅이 <한소리>를 발표했어요. 잘 쓴 곡이지요. 시나위, 육자배기 비슷한 것을 장엄하게 만든 것인데 상당히 성공했어요. (1차대담)

 

18. 무속음악

#푸리(1983),

<푸리>는 완전 무속으로 되어 있어요. 근데 제가 그걸 83~84년도에 쓴건데, 그 당시에는 <마당>은 모두 좋다고 하면서 <푸리>는 이해를 못하는 거에요. 무속음악이니깐. 말로는 좋다고는 하는데 지금처럼 빨리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상황이 아니었어요. 요새 와서는 우리 제자들이 그 음악을 찾아듣고 “아, 선생님. 이 음악을 어떻게 30년 전에 쓸 수 있어요?”라고 물어요. 이제 좀 사람들이 무속에 대해서 관심도 갖고, 이해하고 그러니까 그런 음악을 찾아듣기도 하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게 미신인 줄 알았잖아요. 그 작품은 무당의 삶을 그린 거에요. 근데 곡이 너무 크고 어려워요. 무속 장단 자체가 워낙 독특하고 화려해서. 근데 이제는 그걸 연주하면 사람들이 아마 굉장히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것 같아요. 그러니깐 그런 걸 보면 음악을 받아들이는 것도 어떤 시점이 있는 것 같아요. 그니깐 80년대에는 우리 선배들이 날보고 아주 미친놈이라고 그랬거든. 이건용선생이나 나나 뭐 이상한 음악을 가지고 와서 작곡한다고 그랬어요. 그래도 이강숙 선생님이 확실히 시각이 열려있어서, 저런 음악도 해야 한다고 했지요.

 

19. #푸리(1983) #대한민국 음악제(1983.10)

대한민국음악제에서 <푸리>를 하게 되었지요. 83년에 진흥원에 강헌이라는 매니저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마당>을 보고 새로운 프로그램을 기획하면서 사물놀이가 들어가는 다른 곡을 하나 더 써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그래서 나, 이건용, 이만방, 정부기, 나중에 끼어든 백병동이 만든 곡을 연주하는 공연이 기획되었지요. 그것이 ‘대한민국 음악제 파동’이라는 유명한 사건입니다. KBS지휘자였던 이남수가 공연을 해야 하는데, 전혀 연습을 하지 않았어요. KBS단원이 김덕수와 3악장 중에서 1악장 밖에 못하게 되었다고 전화를 했더군요. 더더욱 기막힌 것은 이건용 선생 곡은 마지막 날까지 한 번도 연습을 하지 않았고, 정부기 곡은 처음부터 안 하겠다고 했다더군요. 백병동이 만든 곡은 연습을 했고, 이만방 작품은 딱 한 번 연습을 했다고 했어요. 이강숙 선생이 직접 KBS에 항의를 했지요.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이 소식이 기자단 사이에서 쫙 퍼져서 공연 30분 전에 모든 기자들이 진을 치고서 기다리고 있었죠. 결국 공연은 못하게 되었어요. 한 악장밖에 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김덕수가 공연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고서는 ‘공연에 오지 않았다’는 핑계를 주지 않기 위해서 모든 공연준비를 마치고서 대기실에서 눌러 앉아버렸지요. 공연이 파행으로 흐를 조짐을 보이자 진흥원의 이사라는 사람이 내려와서 공연을 하자고 간청을 했지만, 완강한 거부 때문에 그의 뜻이 관철되지는 못했어요. 오늘 공연하지 못한 곡들은 나중에 따로 모아서 공연될 수 있도록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언약을 하고서야 공연이 시작되었지만, 한 곡만 마치고 연주회가 끝나버렸죠. 그런데 다음 날 모든 신문들이 사회면에서 이 사건을 크게 다루었고, 대한민국 음악제의 졸속 행정, KBS교향악단의 무분별한… 등등의 제목으로 일주일 내내 신문에서 보도되자, 청와대에서도 사건에 관심을 보이고 정확한 사건 경위를 파악하도록 지시를 내렸지요. KBS 교향악단 전원이 시말서를 쓰고, 이강숙 선생이 2년 동안 (해외) 출장 금지를 당하고, 진흥원 담당직원, 이사, 부장, 그리고 실무자들이 강등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고, 연주되지 못했던 작품들은 85년에 시립 교향악단에 의해서 초연되었어요. 이 사건에 대해서 나, 이강숙, 이만방이 동아일보에 한 주일 동안 릴레이 시평을 썼지요. 그 사건이 있던 날 강준혁 씨 집에 기자들이 모여서 기사를 작성하고 난리들을 피워댔지요. 이 사건을 기화로 해서 사물놀이가 갑자기 엄청나게 유명해졌어요, (음악을 하던 사람들에게도) 사물놀이라는 용어가 낯선 때였으니까요. 신문에 계속해서 보도되니까 하루 아침에 사물놀이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지요. (역설적이게도 방해를 하려고 했던 것이) 오히려 표를 더해준 셈이 되었지요.(1차대담)

 

20. 울타리굿(1985~1993)

선생은 울타리굿에 대한 기억을 한무 육태안 선생과의 만남으로부터 출발하셨다.

“1983년에 <푸리>를 비롯해서 엄청나게 많은 작품을 썼어. 그 때에는 얼마나 많은 양의 일을 했는지 의식이 잘 안되었지만, 작업을 마치고 나면 3.4일간은 기어 다닐 정도였지. 젊었으니까...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다음부터는 큰 작품을 할 때마다 반드시 하는 것이 있지. 밤마다 무협지를 한 권이든 한질이든 읽는 것과 (악보를 그릴) 팔 힘을 키우기 위해서 작품 시작하기 한 두 달 전부터 아령을 하지. 그리고 조깅이 유행했기 때문에 조깅을 했지.

그리고 84년 혹은 85년 즈음에 한무 육태안을 만나게 되었지. 공간 사랑 커피 가게에서 그와 마주 앉게 되었는데, 에너지가 필요할 테니 지금부터 준비하라고 하면서 무엇인가를 끄적끄적 그려서 내게 건네주었지. 운동을 하라고 그려준 것인데, 그것이 수벽 치기 자세를 그린 것이었지. 그것을 매일같이 하라고 하더군. 수벽치기를 하나씩 가르쳐주면서 자기한테 음악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더군. 자신은 무술은 좀 아는데, 음악은 전혀 모른다고 하면서. 구히서 선생도 그 당시 우리집에 들러서 음악과 문화에 관한 많은 얘기를 했지.

 

나는 육태안과 함께 전국의 많은 사찰들을 돌아다니면서 불화, 불상 등을 보았지. 불화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구히서 선생의 말이 맞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지. 마찬가지로 김덕수도 맨날 굿판에 가서 듣고 온 장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지. 당시에 우리들 대부분이 건달이었으니까 <공간 사랑>에 모여서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무엇인가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해서 만든 것이 “울타리 굿”이지, 당시에 <공간 사랑>이 했던 역할은 대단했지. 김수근과 학림의 화류계를 대표하는 강준혁이 이끄는 <공간 사랑>이 한국 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충분하게 다했지” (1차대담)

 

다음은 1989년 12월 30일 호암 아트홀에서 있었던 울타리굿 공연의 팜플릿에 실린 내용이다.

 

“울타리는 지난 ‘85년 여러 분야의 예술인들과 뜻을 같이하는 동호인들이 우리 시대의 새로운 공연예술을 창조하고 연관 예술인, 동호인들의 친목을 위해 만남의 장으로 마련되었습니다.

 

산울림 극장의 개관공연으로 첫 공연을 가진 이래, 문예회관, 공간사랑, 3·5 소극장 등에서 종합예술극의 무대로 매년 공연을 가져 왔다. 또 ‘87년에는 국토통일원이 주최한 “통일굿”으로 임진각에서 공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동안 이 작업에는 김덕수 사물놀이를 비롯하여 강태환 후리재즈 그룹, 무용의 김미경, 김삼진, 전통무예가 한무, 소리의 김경숙, 안숙선, 김성녀, 이금미, 김종엽, 성악가 남의천, 하영일, 작곡가 강준일,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준, 안정의의 서울인형극회, 기국서의 극단 76, 평론가 구희서, 연출가 강영걸, 문화기획가 강준혁 등이 참여하여 최고의 예술무대를 선보여 왔다.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

찬란한 문화를 계승해 온 민족

그리고 높은 뜻을 가진 사람을 존종하는 민족“

 

언제부터인가

모든 것은

한낱

말 뿐

말 뿐으로

언제부터인가

이제는 다시 모여 녹여지든, 썩혀지든

무언가 하나 되리

새로이 하나 되리라

하나되어 번쩍이며 동방을 비추리.

세계를 비추리라.

 

“옛날에도 그러하였거니와 앞으로도 세계 인류가

모두 우리 민족의 문화를 그렇듯 사모하도록“

하리라

또 하리라

 

                            ‘90년을 맞으며

                             울타리 일동

 

#<별가>(1987) #제3세대

87년에 서울예술단 나오자마자 이건용 선생이 문화 예술인가 하는 잡지에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겠다고 해서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내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한 거지요. 그런데 마지막에 제3세대 활동을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아주 조심스레 말을 하더군요. 내 연주회에 많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교류는 아직 없었던 시긴데, 자신이 쓴 책을 주고 갔어요. 그 책 어딘가에 “제3세대는 아니지만, 가장 제3세대적인 음악을 쓰는 사람은 사실 강준일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글이 있더군요. 시론이었던 것 같은데, 그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이 그냥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오랜 생각을 하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가 나에게 “혹시 금기 사항이 있느냐”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별로 그런 것은 없다”고 그랬더니 “당신은 학교도 안 나가려고 하고 그러는데, 혹시 이런 일을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느냐”고 물어서 “그런 건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하는 일이 제3세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연히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어요. 아마 <별가>(<목소리, 현악기, 타악기, 피아노를 위한 <별가>, 1987)를 가지고서 첫번째 작품 발표회를 했던 것 같아요.

 

#88 서울예술단

86년 서울예술단에 들어가면서 살다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린 것 같아요. 거기서 배운 것이 있다면 국가기관의 결정이라는 것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 절대 예술가는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문화수석(허문도)이었던 사람이 나를 지목해서 서울예술단을 만들라고 했어요. 그 일 하면서 남은 게 운전면허를 딴 것이에요. 그때 김영재 선생 만나서 <새불> 작업을 같이 했고요. 국악과 양악의 두 관현악단이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그 중 1/3정도는 김영재 선생이 한 국악. 1/3은 완전히 서양음악, 나머지 1/3은 국악양악 함께였어요. 나중에 얘기 들은 바로는 국악하는 사람들이 황홀했다고 말해주더군요. 홍연택선생이 지휘를 하시고서는, “강선생, 멋있게 잘 썼어. 끝내줘.”라고 말씀해 주셨어요.

2년 후에 올림픽을 하게 되니까 우리가 쓰던 스태프들이 그쪽으로 빠져나갔어요. 당시 총감독하던 이기하 선생이 음악감독으로 누가 믿을만 하냐 해서 이강숙 선생을 끌어와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그래서 이강숙씨가 총감독을 맡게 되었어요. 개회식은 내가, 폐회식은 강석희가 총감독을 맡게 되었죠. 구성의 준비가 다 잘 됐는데, 언제 대통령에 나오는지 누가 축사를 하는지가 결정이 안 되어서 계속 바뀌는 것이에요. 마지막 순간에는 정리를 할 시간이 없어서 난리를 쳤어요. 겨우 실수 없이 잘 가긴 했지만, 새로 만들어진 작품은 30초 쯤 넣고 나머지는 적당히 믹싱해서 집어넣고 끝났어요. 그걸 끝내 놓고 나서 우리나라 민속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사물놀이, 강강술래 등.

그때 깨달은 것이, 이제는 그냥 민속이나 이런 데 매달릴 때가 아니다, 사물놀이 이런 게 아니라 정상적인 음악을 해야겠다, 이제 통일 시대를 생각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음악의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우리 장단과 재료를 그대로 갖고 있는 음악. 두번째 단계는 그걸 서양악기로 담는 것. 세번째 단계는 그걸 국악기로 하겠다는 것, 또 국악도 서양음악을 해야 되는 것.(1차대담)

 

#<우리들의 사랑>(1987) #한국음악극연구소

문호근씨가 유학을 갔다가 돌아와서 자기 나름대로 새로운 음악극 운동을 하고 싶어했던 시기였어요. 처음에 한 것이 “서푼짜리 오페라”와 어떤 것이었지. 그것을 텔레비전에서 조금 소개를 해주더라고. 유행가 비슷한 것을 부르고 하던데, ‘굉장히 새롭고 좋은 생각이구나’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그런데 어느 날 작가들을 모아서 포럼을 하겠다는 연락을 받았지요. 문호근씨가 아마 내가 <새불>(1987)(총체극<새불>, 88예술단 창단공연, 김영재와 공동작업)을 할 때 와서, KBS인가 중계를 하지 않았나 싶어요. 생면부지의 사람도 아니고,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관계고, 자기가 관심을 가져주니까 고맙기도 해서, 참석은 해야겠다고 해서 가게 되었지요. 가보니까 작가도 몇 명 와 있었고. 이건용 선생도 와 있었지요. 자기들이 음악 운동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좋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고, 모두들 참관인으로 이곳에 온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지요. 그랬더니 이건용 선생이 나중에 “한 번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더군요. 그 때 88과 관련된 일도 그만두고, 자유롭기도 했고 정부에 신물이 나 있던 참이라서 “나도 뭔가 좀 해보자. 좋다” 맘을 먹고서 일을 시작했지요. 나와 이건용 선생이 일을 하다가 김철호 선생이 들어왔어요. 국악 쪽에서도 누군가가 일을 좀 해줘야만 했으니까요. 그래서 처음에 <우리들의 사랑>(1987) 이라는 것을 했지요. 그 작품이 원래 <거지들의 오페라>라는 형식이잖아요. 그리고 나서 <구로동 연가>(1988)를 한 것이지요. 150회 정도 공연을 한 것이니까 대단한 성공이지요. <구로동 연가> 하는 도중에 민음연이 만들어졌어요. 우리가 무대 연습을,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동숭동 어딘가에서 연습을 하고 나서 민음연 준비모임을 했는데, 나보고 그 모임에 오라고 권하더군요. 그래서 내가 “민중음악에는 취미가 있지만, 민중음악 연구에는 취미가 없는데”라고 말하고서 거절했지요. 이 후에도 몇 번 더 권고를 받았지만 연구모임에는 끝까지 참가하지 않았어요. 민음협은 그 다음에 생겨났지요. (1차대담)

 

#삼행절곡(1990)

 

#민음협

이건용 선생이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민음협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어요. 94-97년까지 민음협 회장을 맡았다가, 이후 김철호, 오용록 등이 조직을 맡게 되었지요. 그전부터 국악 음악인들에게 회장직을 넘겨 주자는 ‘암묵적 합의’에 따른 것이지요. 82년이 음악적으로 전환기였다면, 92년도는 2002년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변화 발전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1차대담)

 

#한예종교수(1994~2015)

#번뇌의 춤(2000)

#아우름 I (2001)

#해맞이굿(2001)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2002)

#국악관현악곡 <하나되어>(2005),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창단기념

#해금과 현을 위한 <사월>(2005)

#클라리넷 독주곡 <석조>(2007)

#미래악회 ‘작곡가의 초상-강준일의 Trios’(2008)

 

#거리굿(2012)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무용극, 울타리굿 같은 총체예술극에 관여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도 이어져 안동 예술의 전당에서 2012년에 초연한 <거리굿>과 창원시립예술단이 올린 2012년 총체무대극 <백월산이 중천하여>와 2013년 총제무용극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으로 이어진다.

 

# 국악관현악곡 <내나라 금수강산>, 국립국악관현악단 ‘작곡가 시리즈 III’강준일 (2014)

 

#여주작업실

여주 작업실은 자연에서 창작작업(작곡)과 음악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첫 번째 작업실은 1986년, 가남에 있었다. 마을에서 논을 지나서 작은 언덕 옆에 있었다. 여주에 가면 장작을 패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 아궁이가 있어 불을 지폈다.

작업실에는 부엌이 있는 큰 방(거실)과 방이 있었다. 초기에 학생들이 공부하러 왔는데, 장작을 너무 많이 넣어서 큰 방(거실) 바닥이 시커멓게 탔고, 작업실을 옮길 때까지 까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궁이에서 고구마나 고기를 구워먹기도 하고, 불을 피우면서 둘러 앉아 별을 보며 제자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했다.

선생은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서울에서 일하시고, 월요일 저녁에 오셔서 작업하시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서울로 떠나셨다. 떠나실 때는 물통에 물을 떠가셨다.

 

매일아침 산책과 운동을 하셨고, 식사 후에는 집 정리(풀을 베고, 장작을 패고, 나무를 심고, 마당을 정리하시고 등등)를 하시고, 작업(작곡과 공부)을 하셨다.

작업실에는 음악공부(작곡)와 연주 레슨(기악)을 하는 학생들이 자주 찾아왔다. 함께 식사를 준비하고 청소하고 음악을 공부하고 연습하는 공동체 장소였다. 때때로 선생님 지인들이 찾아와서 주제(전통문화 등)를 놓고 밤늦도록 토론의 시간을 가지셨다.

 

가남 작업실에서 2006년까지 계셨고, 2007년에 북내면 운촌리에 작업실을 새로 지으셨다. 첫 번째 작업실보다는 많은 것이 좋아졌다. 아궁이가 없어지고 보일러가 생겼다. 집도 황토로 지어서 겨울에 따뜻하고 여름에 시원했다. 전기시설도 좋아졌고, 부엌과 화장실도 좋아졌다. 선생님 방(작곡)이 있고, 거실과 손님(학생들)방이 있다. 선생님 방에는 100년이 넘은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고 작업(작곡)을 하는 책상이 있다.

 

월요일 음악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여주로 출발하신다. 여주시내 하나로 마트에서 장을 보고 저녁에 여주작업실에 도착해서 간단한 집안 정리와 저녁식사를 하시고, 잠시 휴식을 하신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산책과 체조를 하신다. 아침식사를 하고 집 정리를 하신다. 여름이 가까워지면 마당에 풀 뽑기, 장마에는 집 주변 냇가를 보수 하시고, 가을에는 낙엽치우기, 겨울에는 눈 치우기다. 정리 후에는 작업(작곡 및 공부)을 하신다.

점심을 드시고 가벼운 오침을 하신다. 오침 후에는 오후 작업(작곡 및 공부)을 하시고 저녁을 드시고, 저녁 작업(작곡 및 공부)하고, 9시에는 사모님과 통화 하신다.(언제가부터 사모님과 통화하셨다.) 통화 후 간단한 간식을 드시고 늦은 작업(작곡 및 공부)을 하시고 주무시기 전 간단하게 체조를 하시고 주무신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언제나 같은 생활을 하신다. 그렇게 여주에서 화수를 보내시고 목요일 오전 아침 식사 후 전통원으로 수업하러 출발하신다. 출발 하실 때는 물통에 물을 채워 가신다.

 

가남에서나 북내에서나 선생님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산책과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작업(공부) 사이사이 산책을 하시고, 하루를 마칠 때 체조를 하셨다. 일상(여주 작업실 관리)과 작업(공부)을 함께 하셨다. 작업실은 선생님 집이었지만, 음악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열려 있었고, 음악을 함께 하려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음악을 하는 곳 이었다.

가남에서 시골시러운 생활(아궁이에 불을 지피는)을 했고, 다양한 만남들(다양한 작업, 레슨, 지인들과의 만남 ....)과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북내는 가남보다 편리해진 생활환경 (보일러와 전기, 황토집)속에서 학생들(SMA)과의 공부가 더 열성적으로 이루어진 곳이다.

작곡을 하는 학생들(졸업생들)과 공부 했고, 연주자들과 앙상블 연습을 하고, 선생님의 작품 연습을 집중적으로 하는 곳이었다.

 

#스터디그룹

#안동 예술의 전당

하영일선생이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 관장으로 내려간 후 선생은 그 곳에서 정규 상설 콘써트를 개최하자고 협의하게 되었다. 연주회의 제목은 ‘The Classic’으로 하고, 프로그램 구성과 연주는 주로 SMA 앙상블이 맡았다. 매달 1회 진행하였고 음악회 해설은 하영일선생이 직접 했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의외로 클래식 음악의 고정팬들이 굉장히 많음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선생은 2010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선생이 머릿 속에 구상하고 계셨던 이상을 구체화하실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제2회 아시아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이었다. 이 행사는 첫 해를 일본에서 개최했고 제2회를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류재정씨가 연락을 해서 안동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총16개국에서 참여했고 3일간 열렸는데, 연주회와 워크숍으로 구성되어 우리 문화도 전파하고, 무엇보다 선생의 ‘명상적 보잉’을 공개적으로 소개했다.

‘한국적 전통과 문화가 습윤된 서양음악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연주자가 서양음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는가’ 라는 질문은 선생이 평생 고민했던 화두였다. 아시아의 오케스트라가 모였을 때 던질 수 있는 가장 큰 질문은 결국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양의 악기로 음악을 연주할 때 만들어 내는 소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고, 그 질문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워크숍일 것이다.

 

#2015.6.22.마지막 유작 ‘망각의 강’ 독일에서 초연

2014년 6월(또는 7월), 독일 레겐스부르크 필하모니의 세컨 바이올린 수석으로 있는 제자 한동애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강 선생님 작품을 하고 싶고, 연주회에 선생님을 초청한다는 것이다.

이 초청에 "어우림 시리즈 2"를 함께 하자는 강준택 선생님의 제안으로 제자들이 유럽 투어에 함께 하게 되었다. 어우림 시리즈 2"는 전통과 클래식 공부를 하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가는, 강 선생님의 작곡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창작곡 발표회다.

선생님은 바이올린과 현악 앙상블의 <슬픈노래>와 <번뇌의 춤>을 오케스트라로 정리해서 1, 3악장을 만들고, 2악장 <망각의 강>을 새로 작곡하였다. 여주에서 작업하시고, 서울에 올라오면 수연(딸) 이 피날레로 정리해서 독일로 보냈다.

1, 2악장을 먼저 보냈고, 3악장은 돌아가시던 날 (2015. 3. 19) 차 안에서 발견 되어 장례 후 수연(딸)이 정리하여 독일로 보냈다. 제자들과 함께 유럽 연주 투어를 가시려던 선생님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유작으로 남기시고 떠나셨다.

한동애는 2015년 6년 22과 25일에 레겐스부르크 극장에서 레겐스부르크 필하모니와 협연을 하였고, "어울림2"는 2015년 6월 21일(레겐스부르크 극장), 23일(잘츠부르크 극장), 26일(프랑크푸르트)에서 <강준일, 김정섭, 이고운, 김정근, 김준호, 김인규>의 작품을 연주하였다.

 

 

#개인적 소망

선생은 2005년 1차 대담 시 선생의 소망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여기서 내가 오래 품고 있었던 개인적 소망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지. 그것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 들어보고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지. 정말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내가 30년 전부터 하고 싶었던 것은 탈춤을 무대 위에 올리는 것이었지. 스무 살 때부터 가슴 속에 품고 있던 것은 탈춤을 극화시켜서 무대에 올리는 것이었지. 사실 그것 때문에 사물 놀이에 미친 것이기도 하지. 장단을 알아야 했으니까. 처음에 그것을 해보려고 했는데 탈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없더라고, 중간 중간에 몇 번 해보려고 시도했던 적이 있었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가에 대한 대략적인 구상은 이미 머리 속에 전부 들어있어. 내가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은 독각(=도깨비) 대왕 이야기지. 대강의 줄거리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아.

더 이상 더러운 세상에 살고 싶어하지 않았던 한 회사원이 도깨비 대왕을 찾아가서 도깨비가 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조르기로 결심했어. 그리고 실제로 그를 찾아가서 자신이 온 이유를 말하니, 도깨비 대왕이 왜 도깨비가 되려고 하느냐 하고 물었지. 그 질문에 회사원은 도덕은 사라져 버렸고, 돈과 권력만이 중요하게 된 세상에서 살기보다는 도깨비가 되어서 사는 편이 더 낫다고 대답하자, 대왕은 도깨비가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를 버릴 수 있는지를 시험해보아야만 하겠다고 말하지, 돈, 권력 그리고 사랑을 버릴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시험이지. 주인공은 세 가지를 모두 버릴 수 있다고 도깨비 대왕과 약조를 하고 시험을 시작하지. 돈과 권력을 버릴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을 통과한 그는 마지막으로 사랑을 버릴 수 있는지를 알아보는 시험에서 어떤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되지. 여자를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도깨비 대왕을 찾아가서 약속을 되 물리려고 하지만, 도깨비 대왕은 냉혹하게 그가 도깨비가 될 수 밖에 없다고 선고를 한다는 것이 대강의 내용이지. 30년 동안 음악을 하면서 항상 그것을 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그 동안 약간의 변화도 있었고 윤회적 의미와 현대적 삶과의 연관성을 집어넣어야 할 것 같아. 그런데 문제는 누가 대본을 써줘야 하는데 구히서나 김지하가 고려의 대상이야. 오래 동안 품었던 생각이니까 이것까지는 하고서 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처음에는 한 10년쯤 지나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막상 10년이 지나니까, 이게 어림도 없는 거야. 20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는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지금은 한 5,6년만 준비하면 가능할 것 같은 느낌이야. 내가 줄거리를 좀 더 가다듬고 김지하가 좀 더 안정이 되면 찾아가서 부탁을 해볼 생각이지.

 

지금 내가 해 보고 싶은 것이 두 세가지 있어. 하나는 탈춤 작업이고, 다른 하나는 국악기가 들어간 심포니를 쓰는 거야. 윤이상 선생이 못한. 국악기가 양악기와 같이 나오는 심포니는 쓰는 것. 내가 생각하기에, 내가 실패해도 상관없이, 내가 가야 하는 길이 있는 거야. 노동은 선생이 윤이상 선생 돌아가시기 얼마 전에 찾아가서 한 말이, 선생님께서 민속음악에 관한 작품을 한 두 개만 후학들에게 써주시면 정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 양반이 말은 알아들었지만 상당히 난감하셨을 거라고, 워낙 분야가 다른 것이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국악기와 양악기가 다 들어가서 조화를 이루는 곡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에 (누군가가)하기는 해야만 돼. 현악사중주를 써야만 하는 이유는 음악 이론을 정초시킬 수 있는 표본, 우리나라의 음악이 어떻게 이론화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본을 보여주는 거니까, 그런 것을 남기는 것. 또 하나는 국악기와 관련된 실내악곡을 남기는 것, 민요를 편곡하는 것, 민요 자체를 편곡하는 게 아니라 민요를 여러 다양한 새로운 음악으로 남겨주는 것, 그리고 국악기가 들어가는 편성의 심포니를 꼭 하나 남기는 것, 그리고 탈춤. 이런 것들이 내가 생각하는, 마지막 정리하는 시대의 일이라고 생각해. 거기까지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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