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 강준일의 생애 (나누어 보기, 요약본)
범세대 음악회
무속음악
한예종 교수
한국음악국연구소
음악적 동료들
김복희무용단
88서울예술단
겨울나무
강준혁
SMA 후원회
어린시절
SMA
공간사랑
스터디 그룹
안동 예술의 전당
강준일의 Trios
오케스트라운동
대한민국 음악제
작곡가
청년시절
여주작업실
거리굿
사물놀이
무대음악을 위한 전시회
민음협회장
삼행절곡
번뇌의 춤
아무름1
해맞이굿
백범김구
하나되어
사월
석조
내나라 금수강산
망각의강
우리들의 사랑
별가
푸리
마당
만가
무영탑
내가찾는소리
평생의 음악을 위한 주제
무대음악 작곡가
농촌의 정서
해학적 제스처
제3세대
작곡가시리즈III
울타리굿
<마당>(1983) 범세대 음악회(1983)
83년 막내 동생, 강준택이 시립 교향악단에 공연기획관으로 들어갔다. 강준택이 교향악단을 찾아가서 민속음악을 해야만 악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설득을 했다. 그래서 범세대 연주회를 기획하자고 했고, 시립 교향악단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해서 곡을 쓰게 되었다. 음악회가 4,5회 정도 지속되었다. 강준혁의 아이디어로 사물놀이를 공연하기로 했고, 사물놀이가 들어가는 협주곡을 만들어 달라고 동생들이 간청을 해서 시작을 하기로 했다. 김덕수 패들과 만나서 장단 정리에 대해서 협의를 하기 위해서 3일 정도 함께 일을 했었다. 농악 가락을 녹음해 두었던 테이프를 밤낮으로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주가 끝났고 초연은 커튼 콜을 5번씩이나 받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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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예술종합학교
1994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전통예술원에 출강해왔고, 전통예술원 한국음악창작과 객원교수로 재직하였다.
<우리들의 사랑>(1987) #한국음악극연구소
문호근씨가 이건용 선생과 함께, 자기들이 음악 운동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좋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고, 이건용 선생이 나중에 “한 번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여, 맘 먹고 뛰어들었다. 처음에 <우리들의 사랑>(1987) 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나서 <구로동 연가>(1988)를 했는데, 한 150회 정도 공연을 한 것이니까 대단한 성공이었다. <구로동 연가> 하는 도중에 민음연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무대 연습을,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동숭동 어딘가에서 연습을 하고 나서 민음연 준비모임을 했는데, 나보고 그 모임에 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내가 “민중음악에는 취미가 있지만, 민중음악 연구에는 취미가 없는데”라고 말하고서 거절했다. 이 후에도 몇 번 더 권고를 받았지만 연구모임에는 끝까지 참가하지 않았다. 민음협은 그 다음에 생겨났다. (1차대담)
강준일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음악이란 음악을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고, 그럴 때 가장 행복하다는 것을 깨달았던 분이다. 그 깨달음은 그의 작업이 끊임없이 주변 연주가들과의 교류와 관계 속에서 생산되게 하고, 정릉집과 여주에 있는 선생의 작업실을 수많은 예술가들이 드나드는 통로로 만들었고,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음악 선생으로서, 예술적 동지로서 그의 삶을 지탱해 온 힘이었으며 40여년간 캠프를 지속해 온 원동력이었다. 수많은 명사들이 그와의 작업과 혹은 SMA 캠프와 함께 했다.
<만가>(1982) 김복희무용단
김복희/김화순 무용단이 공연을 하기 위해서 미국을 갔는데 공연 도중에 김복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중도에 급히 귀국을 해야만 했는데, 공황에서 전화로 어머니를 위한 곡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화를 받는 동안 머리 속으로 음악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 <만가>(1982)였다. 만가는 죽은 사람을 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곡은 쓰는데 대략 한 달 정도 걸렸는데, 머리 속에서 곡이 술술 풀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 곡과 <슬픈 영혼을 위한 서시>(1992) 같은 음악은 머릿 속에 음악이 막 가는 것처럼, 무당이 신 내림을 받아서 굿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졌던 곡이다.
86년 서울예술단에 들어가면서 살다 처음으로 브레이크가 걸린 것 같다. 거기서 배운 것이 있다면 국가기관의 결정이라는 것이 체계적이지 않다는 것, 절대 예술가는 직업을 가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시 문화수석(허문도)이었던 사람이 나를 지목해서 서울예술단을 만들라고 했다. 그 일 하면서 남은 게 운전면허를 딴 것이다. 그때 김영재 선생 만나서 <새불> 작업을 같이 했고, 국악과 양악의 두 관현악단이 함께 공연을 했습니다. 그 중 1/3정도는 김영재 선생이 한 국악. 1/3은 완전히 서양음악, 나머지 1/3은 국악양악 함께였다.
2년 후에 올림픽 이강숙씨가 총감독을 맡게 되었고, 개회식은 내가, 폐회식은 강석희가 총감독을 맡게 되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이제는 그냥 민속이나 이런 데 매달릴 때가 아니다, 사물놀이 이런 게 아니라 정상적인 음악을 해야겠다, 이제 통일 시대를 생각해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음악의 방향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우리 장단과 재료를 그대로 갖고 있는 음악. 두 번째 단계는 그걸 서양악기로 담는 것. 세 번째 단계는 그걸 국악기로 하겠다는 것, 또 국악도 서양음악을 해야 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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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준혁선생은 막내인 강준택선생과 함께 전체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예술적 동반자였다. 강준혁선생은 그 자신 클라리넷 연주자로서 SMA 캠프의 공동 주관자로서 선생의 음악적 인생의 시작부터 함께 했으며, 소극장 공간사랑을 통해 ‘무대음악을 위한 전시회’, ‘울타리굿’ 등 많은 음악적·예술적 실험을 함께 했다. 그 후에도 강준혁선생이 이끄는 예술기획 메타의 임진각 평화축전(2005), 전주 소리축제, 몽골 나담축제(2008~2010) 등 여러 작업에 함께 참여했다.
#SMA 후원회
SMA 처음 시작부터 후원회 조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동부그룹 셋째 아들, 김태욱사장, 주광수선생, - 캠프할 때 간식 등 가지고 오심. 준일(서울고 합창반장), 준혁 서울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김재익(1938-1983) 전 경제수석(마당 초연 때 왔었음, 부인은 큰누님과 친분), 동부그룹, 김태욱사장, 김대열, 최영천(영화제작), 김소선(후원회 대모), 구히서(기자), 성인숙(기자)
미술계의 최옥경 화가,
공연 같이 한 사람-김소희, 성금련, 신영희, 안숙선, 등
운당여관 – 박귀희 선생. (하영일 선생과의 대담, 2017.08. 19, 예술의전당)
강준일은 아버지 강갑문(姜甲文)과 어머니 최정란(崔貞蘭)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갑문은 한일은행 지점장을 지냈고 교회 장로로서 성가대를 지휘하였다. 그로 인해 기독교적 세계관과 서양음악적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그가 어렸을 때 한국은 여전히 농경사회의 문화가 많이 남아 있었고, 그의 고향 충남 서천은 더더욱 그러했다.
#SMA,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1968년 조직했던 음악캠프를 계기로 1970년 발족된 ‘서울음악학회’(이하 SMA)는 음악대학이 있었지만 제대로 된 서양음악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던 시대에 자생적으로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해보고자 했던 오케스트라운동이다. 선생은 돌아가실 때까지 매회 1년에 두 번씩, 여름과 겨울에 SMA 캠프를 열었다. 캠프는 한 해도 쉬지 않고 열렸으며 현재도 SMA 후배들에게 의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자생적으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선배가 공부하고 후배들이 함께 학습하는 학습공동체라는 점에서, 실내악 또는 오케스트라 중심의 음악캠프였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우리가 SMA라고 하는 단체를 제가 사십 몇 년을 해왔는데, 이제 그걸 시작하게 된 동기는 단순했어요. 그냥 선생님이 없으니까. 우리끼리 모여서 그냥 학구적으로 우리끼리 공부를 해서 음악을 해보자. 그래서 서울뮤지션스아카데미라고 이름을 아카데미라고 하는 이름을 붙인거에요. 그렇게 시작을 해서 사십 몇 년 째 캠프를 첫 몇 년은 여름만 하다가 여름 겨울 이렇게 하는데 우리 캠프의 특징은 모든 전공이 다 같이 하는 거에요. 지금은 어떤 형태가 됐냐면 거의 공동체처럼 작곡하는 아이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연주하는 아이들과 생활하고 같이 공부하고 그래요. 한 십년 전까지만 해도 20대 중반이 되면 다 외국을 가야되니까 이 생활이 끊어졌는데 지금 30대 들어간 애들이 외국을 안 가고 이걸 이어가게 되니까. (2차대담)
1975년이 되면 회관이 없어져서 모임을 이어가기가 어려워졌다. 장소를 두어 번 옮겨가며 있다가 여건이 나빠지기도 했고, 당시 생각하기를 오케스트라 운동을 하는 건 너무 소모적이라 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또 초창기 창단 멤버들이 직업을 갖거나 오광호, 임헌정 등이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러면서 활동이 소극적이 되어갈 때 쯤, 1977년 강준혁 선생님이 공간사랑의 극장장으로 가게 되었다. 학림 다방, 세실 극장 그리고 공간 사랑으로 한국 문화가 절묘하게 이어져가는 느낌이 든다고 선생은 기억한다.
공간사랑은 우리 전통문화를 중흥 시켜야겠다고 해서, 당시 남아있던 굿, 농악 이런 것을 모두 무대 위에 올렸다. 처음으로 굿이 무대 위로 올라간 것이다. 사물놀이도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고, 또 지금 많이 알려진 공옥진이나 이매방 이런 분들이 다 강준혁선생의 손에 의해서, 퍼포밍 아트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선생은 자신을 둘러싼 삶의 여러 장면 중 이 경우는 확실히 숙명이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안숙선 선생이나 김덕수 선생이 다 30대도 안된 나이, 서로 모여가지고 우리나라의 이 좋은 전통음악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냐 하면서 막걸리 마시고 신세타령하면서 어울리던 그런 장면을 선생이 함께 경험하게 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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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일선생이 안동 문화예술의 전당 관장으로 내려간 후, 이 곳에서 선생은 2010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선생이 머릿 속에 구상하고 계셨던 이상 중 몇 가지를 구체화하실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제2회 아시아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이었다. 이 행사는 첫 해를 일본에서 개최했고 제2회를 일본에 있는 재일교포 류재정씨가 연락을 해서 안동에서 실시하게 되었다. 총16개국에서 참여했고 3일간 열렸는데, 연주회와 워크숍으로 구성되어 우리 문화도 전파하고, 무엇보다 선생의 ‘명상적 보잉’을 공개적으로 소개했다.
‘한국적 전통과 문화가 습윤된 서양음악이란 무엇인가, 한국의 연주자가 서양음악을 한다는 것은 어떤 소리를 만들어내는가’ 라는 질문은 선생이 평생 고민했던 화두였다. 아시아의 오케스트라가 모였을 때 던질 수 있는 가장 큰 질문은 결국 ‘아시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서양의 악기로 음악을 연주할 때 만들어 내는 소리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이고, 그 질문을 찾아나가는 과정의 워크숍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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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리(1983) 대한민국 음악제(1983.10)
<푸리>는 완전 무속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무속에 대해서 관심도 갖고, 이해하고 그러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게 미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했다. 그 작품은 무당의 삶을 그린 거다. 근데 곡이 너무 크고 어렵다. 무속 장단 자체가 워낙 독특하고 화려하다. 근데 이제는 그걸 연주하면 사람들이 많이 공감할 것 같다. 대한민국음악제에서 <푸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대한민국 음악제 파동’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생긴다. 이 때 위촉 받은 작곡가들(이건용, 정부기, 백병동, 이만방, 강준일)이 모두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라 KBS 교향악단이 연습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연이 무산된 사건이었다. KBS 교향악단 전원이 시말서를 쓰고, 이강숙 선생이 2년 동안 (해외) 출장 금지를 당하고, 진흥원 담당직원, 이사, 부장, 그리고 실무자들이 강등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고, 연주되지 못했던 작품들은 85년에 시립 교향악단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을 기화로 사물놀이가 갑자기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강준일은 1944년 12월 5일 충청남도 서천에서 출생했다. 서울대 문리대 물리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 음대 작곡과에서 수학했다. 1970년 서울음악학회(Seoul Musicians' Academy)를 창립한 이후 매년 SMA 음악캠프를 주관하였으며, 1983년부터 2011년까지 창작가곡발표회 ‘겨울나무’를 매년 개최하여 우리 현대어의 음악화를 모색해왔다. 1986년 이후에는 창작동인회 ‘제3세대’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1988년 88올림픽 개폐회식 음악위원 및 1994-97년 한국민족음악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1994년부터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전통예술원에 출강해왔고, 전통예술원 한국음악창작과 객원교수로 재직했다.
전업 작곡가로서 평생 우리 전통음악을 현대화하는 작업에 몰두해왔으며, 100여곡이 넘는 작품들 가운데 대표작으로는 사물놀이와 관현악을 위한 <마당>, 목소리, 비올라, 첼로, 피아노, 타악기를 위한 <만가>, 바이올린 세대를 위한 <삼행절곡>, 관현악곡 <천년천세지곡>, 국악관현악을 위한 <소리그림자 1번>(첼로 협연), 극적 칸타타 <백범 김구>, 해금협주곡 <사월>, 국악관현악곡 <하나되어> 등이 있다.
젊은 시절 서양음악을 공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중에 하나가 “보이스 오브 유나이티드 네이션(VNC)”라고 하는 UN 군 사령부에서 하는 방송이었다. 우리나라의 1960년대 지성인들의 삶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르네상스 다방도 그의 삶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부친의 사업 실패 후 한 때 음악을 포기하고 부산으로 돈을 벌려 내려가는데, 그 곳에서 다시 음악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절실함을 느끼고 다시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68년경부터 학림다방 디제이를 하며 다시 음악에 대한 꿈을 꾸게 된다. 선생은 이 시절의 경험을 “밑바닥에서부터 물이 차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고 회고한다. “67년부터 내가 최초로 곡을 쓴 71년까지의 일련의 사건들은 나에게 음악을 할 수 밖에 없도록 단계적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여주 작업실은 자연에서 창작작업(작곡)과 음악을 공부하는 곳이었다.
첫 번째 작업실은 1986년, 가남에 있었다. 선생은 금요일부터 월요일까지 서울에서 일하시고, 월요일 저녁에 오셔서 작업하시다 목요일이나 금요일에 서울로 떠나셨다. 가남 작업실에서 2006년까지 계셨고, 2007년에 북내면 운촌리에 작업실을 새로 지으셨다. 첫 번째 작업실보다는 많은 것이 좋아졌다. 선생님 방에는 100년이 넘은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있고 작업(작곡)을 하는 책상이 있다.
가남에서나 북내에서나 선생님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언제나 산책과 체조로 하루를 시작하고, 작업(공부) 사이사이 산책을 하시고, 하루를 마칠 때 체조를 하셨다. 일상(여주 작업실 관리)과 작업(공부)을 함께 하셨다. 작업실은 선생님 집이었지만, 음악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열려 있었고, 음악을 함께 하려는 이들과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었다.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음악을 하는 곳 이었다.
거리굿(2012)
선생은 젊은 시절부터 무용극, 울타리굿 같은 총체예술극에 관여해왔다. 이러한 경험은 후에도 이어져 안동 예술의 전당에서 2012년에 초연한 <거리굿>과 창원시립예술단이 올린 2012년 총체무대극 <백월산이 중천하여>와 2013년 총제무용극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으로 이어진다.
사물놀이는 공간사랑을 통해 1978년부터 시작되었다. 첫 사물놀이 구성원은 김덕수, 김용배, 최종석, 최태현이었다. 선생의 초창기 대표작인 <마당>, <푸리> 등이 이들과 연관되어 있다.
무대음악을 위한 전시회(1977~1985)
강준혁 선생이 일하던 공간 사랑에서 무대 음악을 위한 전시회라는 이름의 공연이 3개월에 걸쳐서 매 달 한 번씩 열렸는데, 무대 음악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음악회에 와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음악을 사가거나 이용하도록 만들려는 것이 원래의 의도였다. 이돈웅, 임헌정 등의 음악이 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선생의 작품 중 <춤의 유희>(1977), 비올라 독주곡 <짓>(1985), 첼로, 비올라, 피아노를 위한 <소리>(1982) 등이 이 기획을 위해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이건용 선생이 한국예술종합학교로 옮겨가게 되었을 때, 민음협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94-97년까지 민음협 회장을 맡았다가, 이후 김철호, 오용록 등이 조직을 맡게 되었다. 그전부터 국악 음악인들에게 회장직을 넘겨 주자는 ‘암묵적 합의’에 따른 것이다. 82년이 음악적으로 전환기였다면, 92년도는 2002년까지 이어지는 사회적 변화 발전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1차대담)
세 대의 바이올린을 위한 <삼행절곡(三行折曲)>(1990)
우리는 전통적으로 셋이라는 수를 신성하게 여겨왔다.
셋이란 모여 하나를 이루어 “서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하나로부터 시작되어 하나가 둘(陰陽)을 낳고 이 둘이 어우러져 다시 하나를 이루는 이른바, <陰陽三才>의 원리야말로 우리 선조들로부터 물려받는 우리의 고유한 삶의 지혜다.
이런 뜻을 쫓아 소리를 운행해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의도이다.
하나의 소리에 대응하는 새로운 소리가 탄생한다.
그러나 이들 모습은 다음에 태어나는 새로운 소리로 해서 전혀 새로운 상황을 만든다.
이런 이치를 여러 가지로 변화시켜 다섯 곡(五行)을 만들어 보았다. 우리 선조들의 독특한 변증법적 생성의 원리를 쫓아 옛 소리의 모습을 복원해본 것이다.
<번뇌의 춤>(2000)
이보연을 위한 바이올린 협주곡 제3악장을 위해 마련된 작품으로, 주제는 “망나니 칼춤”에서 따온 것이다. 망나니 칼춤은 죽음을 앗아가야 하는 번뇌의 춤이다. 그러나 그의 괴기한 모습의 탈과 살벌한 춤이 절정에 달할 때쯤이면 사자는 마침내 두려움에서 벗어나 끝없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 때에 칼이 떨어지고 마침내 삶의 “번뇌”도 끝난다. 이렇게 망나니 춤은 번뇌의 춤이자 구원의 춤이며 또한 승화의 춤이다. 죄수와 망나니의 이중적인 심정과 삶과 죽음이 가져다주는 아이러니가 하나의 과정으로 승화되어 가는 과정을 묘사한 곡이다.
바이올린과 가야금을 위한 <아우름>(2001)
동서양의 두 악기가 서로의 소리를 알뜰히 보살피며 울려 가는 곡이다. ‘신선의 경지에 이른 작곡’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첼로, 피아노, 장고를 위한 <해맞이 굿>(2001)
이 작품은 첼리스트 요요마의 의뢰로 2001년 Silk-road Project Festival에서 연주되었다.
작품의 발상은 실크로드 동쪽 끝에 자리 잡은 “해 뜨는 나라” 한국의 이미지를 인상적으로 다루려 했다.
동짓날 해를 맞이하는 민속의식은 주로 동해가 바라보이는 고산지대 마을에서 행해졌다고 한다. 해 뜨기 전에 마을 사람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 바다가 보이는 산 위로 올라가 해를 맞는 의식을 치르며, 새해의 화를 물리고 발복 기원했던 것이다.
곡은 다섯 거리로 구성된다.
1. 여는 소리: 동 트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의 정경
2. 아우름 : 마을 사람들이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산으로 행군한다.
3. 터벌림 : 텃신에게 드리는 고사
4. 맞이 굿 : 떠오르는 해를 향한 춤
5. 무가(巫歌) : 발복 기원하는 무당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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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현악을 위한 협주곡 <하나되어>(2005)
이 작품은 국악원 창작악단의 창단과 발전을 상징하는 뜻에서, 또 한편으로는 모든 단원의 연주기량의 향상을 위해 특별히 만든 작품이다. 작품 전체를 통해서 모든 단원이 독주자이자 동시에 합주자로 참여한다. 첫째거리에서 모두 하나의 뜻을 향해 모여들어 하나로 나아갈 것을 다짐한다. 둘째거리에서 서로 사귀고 소통하며 함께 나누어 갖는다. 셋째거리에서 마침내 뜻을 모아 ‘하나되어’ 정답게 노래하며 함께 나아간다.
해금과 서양 실내악을 위한 해금협주곡 <사월>(달그리워)
이 작품은 특별히 정수년의 해금 독주와 서양 현악합주를 위해 만든 협주곡이다.
“달그리워”는 끝없이 빠져드는 그리움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리움”은 우리 겨레만이 지닌 독특성 정서인 듯싶다. 못 다한 사랑을, 헤어진 가족을, 따스한 우정을, 지난 세월의 추억들을, 왠지 그리워 마음 속 깊이 마치 병처럼 연민을 지우지 못하는 끈끈하고도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하려 했다. 해금의 애절한 소리는 원색적인 우리의 감정을, 서양악기는 현대에 사는 오늘날 우리의 서정을 대변한다. 이 각박한 도시문명의 시대에 아직도 우리 마음 속 깊이 이런 절실한 감정이 숨어있음을 전하고 싶다.
<석조>(2007)
작곡가 강준일이 40년 넘는 세월을 지켜봐온 우리시대의 진정한 예술가 오광호 선생에게 바치는 노래이다. 오광호 선생의 성실하고도 화려했던 예술적 삶의 발자취를 저물어가는 찬란한 저녁 해에 비유해서 그려 본 곡이라고 작곡가는 말한다. 그런 뜻으로 작곡가는 이 작품에 자작 시 한 구절을 부쳤다.
“석양에 홀로 서서 지는 해를 바라보니, 찬란했던 하루를 마감하듯 긴 그림자 드리우네..“
곡은 4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찬란하게 저물어가는 저녁 해 - 어둡게 드리우는 밤 그림자 - 밤의 휴식과 정적 - 밝은 새날을 꿈꾸며.
클라리넷 음색의 찬란한 광채와 어두운 고요와 정적이 교차하면서 빚어내는 아름다운 음색의 변화를 음미하면서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마치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한 예술가의 과거를 회상하듯이...
(이미경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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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6.22.마지막 유작 ‘망각의 강’ 독일에서 초연
2014년 6월(또는 7월), 독일 레겐스부르크 필하모니의 세컨 바이올린 수석으로 있는 제자 한동애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강 선생님 작품을 하고 싶고, 연주회에 선생님을 초청한다는 것이다. 이 초청에 "어우림 시리즈 2"를 함께 하자는 강준택 선생님의 제안으로 제자들이 유럽 투어에 함께 하게 되었다. 어우림 시리즈 2"는 전통과 클래식 공부를 하고 새로운 음악을 찾아가는, 강 선생님의 작곡 정신을 이어받은 제자들의 창작곡 발표회다.
선생님은 바이올린과 현악 앙상블의 <슬픈노래>와 <번뇌의 춤>을 오케스트라로 정리해서 1, 3악장을 만들고, 2악장 <망각의 강>을 새로 작곡하였다. 여주에서 작업하시고, 서울에 올라오면 수연(딸) 이 피날레로 정리해서 독일로 보냈다.
1, 2악장을 먼저 보냈고, 3악장은 돌아가시던 날 (2015. 3. 19) 차 안에서 발견 되어 장례 후 수연(딸)이 정리하여 독일로 보냈다. 제자들과 함께 유럽 연주 투어를 가시려던 선생님은 바이올린 협주곡을 유작으로 남기시고 떠나셨다.
한동애는 2015년 6년 22과 25일에 레겐스부르크 극장에서 레겐스부르크 필하모니와 협연을 하였고, "어울림2"는 2015년 6월 21일(레겐스부르크 극장), 23일(잘츠부르크 극장), 26일(프랑크푸르트)에서 <강준일, 김정섭, 이고운, 김정근, 김준호, 김인규>의 작품을 연주하였다.
<우리들의 사랑>(1987) #한국음악극연구소
문호근씨가 이건용 선생과 함께, 자기들이 음악 운동을 한 번 해보려고 한다고 하길래, ‘그런가 보다’, ‘좋은 일이다’ 라고 생각했고, 이건용 선생이 나중에 “한 번 같이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권하여, 맘 먹고 뛰어들었다. 처음에 <우리들의 사랑>(1987) 이라는 것을 했다. 그리고 나서 <구로동 연가>(1988)를 했는데, 한 150회 정도 공연을 한 것이니까 대단한 성공이었다. <구로동 연가> 하는 도중에 민음연이 만들어졌다. 우리가 무대 연습을, 지금은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데, 동숭동 어딘가에서 연습을 하고 나서 민음연 준비모임을 했는데, 나보고 그 모임에 오라고 권했다. 그래서 내가 “민중음악에는 취미가 있지만, 민중음악 연구에는 취미가 없는데”라고 말하고서 거절했다. 이 후에도 몇 번 더 권고를 받았지만 연구모임에는 끝까지 참가하지 않았다. 민음협은 그 다음에 생겨났다. (1차대담)
#<별가>(1987) #제3세대
87년에 서울예술단 나오자마자 이건용 선생이 문화 예술인가 하는 잡지에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겠다고 해서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한 거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제3세대 활동을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 연주회에 많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교류는 아직 없었던 시긴데, 자신이 쓴 책을 주고 갔다. 그 책 어딘가에 “제3세대는 아니지만, 가장 제3세대적인 음악을 쓰는 사람은 사실 강준일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글이 있었다. 시론이었던 것 같은데, 그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이 그냥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오랜 생각을 하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하는 일이 제3세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연히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별가>(<목소리, 현악기, 타악기, 피아노를 위한 <별가>, 1987)를 가지고서 첫번째 작품 발표회를 했던 것 같다.
푸리(1983) 대한민국 음악제(1983.10)
<푸리>는 완전 무속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사람들이 무속에 대해서 관심도 갖고, 이해하고 그러지만 옛날에는 사람들이 이게 미신인 줄 알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해를 잘 못했다. 그 작품은 무당의 삶을 그린 거다. 근데 곡이 너무 크고 어렵다. 무속 장단 자체가 워낙 독특하고 화려하다. 근데 이제는 그걸 연주하면 사람들이 많이 공감할 것 같다. 대한민국음악제에서 <푸리>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때 ‘대한민국 음악제 파동’이라는 유명한 사건이 생긴다. 이 때 위촉 받은 작곡가들(이건용, 정부기, 백병동, 이만방, 강준일)이 모두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들이었기 때문에 소위 말하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었기 때문이라 KBS 교향악단이 연습을 하지 않았고 그래서 공연이 무산된 사건이었다. KBS 교향악단 전원이 시말서를 쓰고, 이강숙 선생이 2년 동안 (해외) 출장 금지를 당하고, 진흥원 담당직원, 이사, 부장, 그리고 실무자들이 강등되는 것으로 사건이 일단락 되었고, 연주되지 못했던 작품들은 85년에 시립 교향악단에 의해서 초연되었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건을 기화로 사물놀이가 갑자기 엄청나게 유명해졌다.
<마당>(1983) 범세대 음악회(1983)
83년 막내 동생, 강준택이 시립 교향악단에 공연기획관으로 들어갔다. 강준택이 교향악단을 찾아가서 민속음악을 해야만 악단의 가능성이 있다고 설득을 했다. 그래서 범세대 연주회를 기획하자고 했고, 시립 교향악단에서 처음으로 작품을 의뢰해서 곡을 쓰게 되었다. 음악회가 4,5회 정도 지속되었다. 강준혁의 아이디어로 사물놀이를 공연하기로 했고, 사물놀이가 들어가는 협주곡을 만들어 달라고 동생들이 간청을 해서 시작을 하기로 했다. 김덕수 패들과 만나서 장단 정리에 대해서 협의를 하기 위해서 3일 정도 함께 일을 했었다. 농악 가락을 녹음해 두었던 테이프를 밤낮으로 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연주가 끝났고 초연은 커튼 콜을 5번씩이나 받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만가>(1982) 김복희무용단
김복희/김화순 무용단이 공연을 하기 위해서 미국을 갔는데 공연 도중에 김복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중도에 급히 귀국을 해야만 했는데, 공황에서 전화로 어머니를 위한 곡을 지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전화를 받는 동안 머리 속으로 음악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아서 작곡한 것이 <만가>(1982)였다. 만가는 죽은 사람을 염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장지로 떠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이 곡은 쓰는데 대략 한 달 정도 걸렸는데, 머리 속에서 곡이 술술 풀려서 나오는 것 같았다. 이 곡과 <슬픈 영혼을 위한 서시>(1992) 같은 음악은 머릿 속에 음악이 막 가는 것처럼, 무당이 신 내림을 받아서 굿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들어졌던 곡이다.
<무영탑>(1975)
젊은 시절, 아직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던 때(74년경), 숙대 교수였던 무용가 송수남 씨가 숙대 학생들을 데리고 공연을 했었다. 그녀의 남편이 국회 문공위 위원이었던 덕분에 국립극장을 빌려서 무용 발표회를 할 수 있게 되었는데, 동덕여대 미술과 교수였던 이화수가 대본을 쓰고, 나에게는 음악을 써달라는 의뢰를 했다. 그래서 내가 1, 3막을 하고, 서울대 국문과를 나와서 경희대에서 작곡 공부를 한 한성석이라는 작곡가가 4막, 진규영이 2막을 맡게 되었다. <무영탑>(1975) 작업을 하면서 무대에 대한 감각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을 통해서 <봄>(1976) 작품을 체계적으로 준비할 수 있는 경험을 얻게 되었다.
내가 원하는 소리라는 것이 … 소 방울로 쓰기도 했었고, 사립문에다 걸기도 했던 우리나라의 종이 있다. 이걸 어느 고물시장에서 샀는데, 이 소리는 ‘시’하고 ‘파’, 즉 증 4도 소리다. 4도에서 약간 벗어난 소리와 더 비슷하다. 어느 날 이런 소리들을 들으면서, 이게 단순히 3화음은 아니다. 우리가 학교에 들어가면 어렸을 떄부터 (<학교종이 땡땡땡>을 피아노로 치면서) 이런 음악을 배운다. 그러나 원래 우리에게 둘러싸인 소리, 우리가 듣고 살던 소리는 자연음에 가까운 그런 소리였는데, 갑자기 이런 정화된 노래를 듣게 된 것이다. 비극이다. 분명히 우리 한 쪽에는 그와 다른 문화를 가지고 있다. 고물상에서 잔뜩 이 비슷한 물건들을 사들고 와서, 소리를 연구해 보니 ‘아, 내가 이때까지 정말 바보 같은 짓을 했구나. 세상에! 이런 소리를 내라고 해야 되는데 왜 나는 도미솔 이런 것을 하고 있었지? 정신이 나갔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평생의 음악을 위한 주제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보니 82/83년에 쓴 <만가>(1982) 등의 작품들이 내가 할 평생의 음악을 위한 주제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가>의 특징은 상당히 선적이다. 굉장히 많은 것들이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음악이 단 하나의 선을 타고 계속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마당>(1983)은 굉장히 리듬이 풍부하고, 입체적이고 그 리듬이 점점 발전해서 무엇인가를 향해서 가는 듯한 느낌이 들고, <푸리>(1983)는 가능하면 장단이 갖고 있는 즐거움과 맛을 살려내려고 신경을 쓰면서 만든 작품이고, <열두거리>(1983)는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음식을 다 먹고 난 다음에 후식을 먹는 것처럼 쓴 것이다.
스트라빈스키 같은 무대음악작곡가
발레모음곡 <봄>(1976)은 선화예고에 무용을 가르치러 와 있던 댈러스라는 사람이 발레단을 만들려고 했는데 이 분이 발레에 대해서 전혀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발레의 기본 에튀드 모음곡을 작곡해달라고 부탁을 했었다. 원래는 피아노를 위해서 쓴 곡을 그들의 발레에 맞게 고쳐서 공연을 했다. 그것을 오케스트라로 녹음을 해서, 공연했는데, 그것이 내가 작곡한 두 번째 커다란 공연이었다. 그 당시에 나의 꿈은 스트라빈스키 같은 무용음악을 작곡하는 음악가가 되는 거였다.
<마당>은 농악 장단으로 되어 있는데 농악 장단이 갖고 있는 어떤 그 특색이 있다. 내가 어렸을 때 살던 농촌의 그 느낌을 사실 그대로 다 갖고 있는 곡이다. 첫 번 곡은 오채질굿이 나오는데 봄에 마을 건너편 저 끝 새까맣게 먼 논에서부터 풍물을 치면서 온다. 그러면 괜히 사람들이 봄이라고 생각하는 들뜬 마음이 있다고, 그냥 농사가 문제가 아니라, “야, 드디어 이제 봄이 오나보다.” 그런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두 번째 장면이 나오는데 그게 풍년굿이라고 해서 추수할 때 사람들이 추는 굿거리인데 굿거리를 굉장히 단순화 시킨거다. 그걸 탁하면 막 그냥 춤이 나오는거지 너무 기뻐서. 두 번째 악장의 경우는 ‘잔칫날’이라고 제목을 붙인 건데, 우리 설날이나 추석날 보면 친척들이 찾아오고, 산을 찾아가고 뭔가 어린아이들은 기대 속에 부풀어 있고, 그런 날 아침 풍경부터 저녁까지 마지막에 술이 얼큰히 취해서 하루가 저물어 가는 그런 장면까지를 그리고 있다. 그 다음에 마지막 장은 장날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그런 농촌에 살지 않았더라면 그런 서정이 남아 있을 리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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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가>(1987) #제3세대
87년에 서울예술단 나오자마자 이건용 선생이 문화 예술인가 하는 잡지에 나를 소개하는 글을 쓰겠다고 해서 집으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내 작품에 대한 인터뷰를 한 거였다. 그런데 마지막에 제3세대 활동을 같이 하는 게 어떻겠냐고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내 연주회에 많이 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적인 교류는 아직 없었던 시긴데, 자신이 쓴 책을 주고 갔다. 그 책 어딘가에 “제3세대는 아니지만, 가장 제3세대적인 음악을 쓰는 사람은 사실 강준일이다”라고 생각한다는 글이 있었다. 시론이었던 것 같은데, 그 글을 통해서 그 사람이 그냥 나를 보러 온 것이 아니고 오랜 생각을 하고 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생각하기에 내가 하는 일이 제3세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당연히 같이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별가>(<목소리, 현악기, 타악기, 피아노를 위한 <별가>, 1987)를 가지고서 첫번째 작품 발표회를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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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시 육태안과 함께 전국의 많은 사찰들을 돌아다니면서 불화, 불상 등을 보았다. 불화 속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는 구히서 선생의 말이 맞다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마찬가지로 김덕수도 맨날 굿판에 가서 듣고 온 장단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당시에 우리들 대부분이 건달이었으니까 <공간 사랑>에 모여서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무엇인가를 해보자고 의기투합해서 만든 것이 “울타리 굿”이다. 당시에 <공간 사랑>이 했던 역할은 대단했다. 김수근과 학림의 화류계를 대표하는 강준혁이 이끄는 <공간 사랑>이 한국 문화의 맥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충분하게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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