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헌사
정수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원 교수, 해금연주자)
강 준 일
나는 선생님을 이렇게 소개하고 싶다
진정한 예술가의 삶을 살다 가신 분
마르지 않는 깊은 우물에서 맑은 물을 길어 올리는 작곡가
그 물을 한국음악계에 공급하여 음악적 갈증을 해소 해 주고 우리가 가야 할 방향성을 제시 해주는 참 스승
‘해금의 혁명’을 위해 이끌어 주신 나의 영원한 멘토
늘 격려하고 함께 고민해 주신 고마운 스승이자 나의 음악동료
선생님의 갑작스런 죽음은 너무나 충격이었고 아직도.. 그렇다
나와 해금, 더 나아가 한국음악의 발전을 노래하고자 함께 하시던 동료이자 친구이자 참스승을 잃은 느낌은 텅빈 방안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지금도 나의 연주에 대한 조언을 해 주실 듯한데.. 여쭐 분이 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슬프다.
내게 신앙이 없었다면 참으로 극복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선생님의 전통음악을 위한 새로운 작업은 크게 세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국악기를 위한 작품을 만드셨고
두 번째 판소리를 소재로 챔버오케스트라와 어울림을 시도하셨으며
세 번째 국악스터디를 통해 옛 명인, 명창들의 연주와 소리를 듣고 더욱 국악을 이해하고 그것의 가치를 담아 내려고 노력하셨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첫 번째 작업으로 국악기 중 해금을 위한 작품을 많이 남기셨다. 그 이유는 나와 2003년부터 해금을 위해 많은 시간을 소통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통적인 해금소리, 해금소리의 원형질을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셨다.
선생님의 작품을 처음 연주한 것은 2003년 소프라노 김경희 선생님의 발표회 위촉작인 소프라노와 해금과 피아노를 위한 ‘소리타래’ 였다. 나는 그 당시 대중을 위한 음반 출반으로 들에많은 긍정적 관심을 받고 왕성한 연주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악보를 받고서 나는 보면대에 며칠동안 그냥두고 바라만 봤다. 내가 전혀 접해보지 않아 알 수 없었던 음진행과 예측불가능한 선율들은 단 한줄도 쉽게 나아가지 못했다. 그럼에도 너무나 매력적인, 무언가 감추고 있는 보물이 있는 듯했다. 앙상블을 해보면 해 볼수록 새로움이 발견되는 성취감이 있었다
너무 어렵지만 나로부터 만족을 주는 선생님의 작품이 신기했다
이보연 (바이올리니스트)
강준일선생님을 처음 뵌 것은 나의 스물두살 여름방학 때였다. 어떤 친구는 재미있는 선생님이라고 했었고, 어떤 선배는 무척 어려운 어른이라고 말했었다. 같은 동네(정릉) 분이어선지 나에겐 친근한 첫인상으로 보이셨다. 실내악 캠프와 음악 분석 스터디에서 선생님의 강의와 설명을 신나게 듣고서, 나도 내가 연주하는 음악들을 다시 생각해 보며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고, 다음 해엔 선생님께 새로운 곡을 의뢰 드리게 되었다. 용기내어 여쭤보았는데 선생님께서 기꺼이 곡을 써서 뉴욕으로 보내주셔서 열심히 궁리하고 준비하여 카네기 와일홀에서 뉴욕데뷔를 무사히 치르게 되었다. 1993년 작 소곡1번이다. 청중과 음악인들에게서 곡에 대한 호평을 많이 들었다. 신곡이지만 듣는 순간 그 생동감에 그들이 반응한다는 것을 나도 연주하며 감지할 수 있었다. 연주실황녹음을 선생님께 들려드렸더니 잘했다고 칭찬해주시며 선생님께서 원하시는 한국적인 표현들을 알려주셨다. 농현과 장단이었다. 처음 접하는 기교였지만, 나도 한국사람인지라 금방 몸에 맞는 무언가가 느껴지고 곡에 생명이 불어넣어진 듯 했다. 혈맥을 뛰게하는 한국음악의 매력은 내 손가락을 절로 움직이게 하는것만 같았다.
이후 몇년간 강준일선생님은 바이올린 곡을 많이 쓰셨다. 후일 회상하시길, "그때 내가 바이올린에 미쳐 있었지." 라고 하셨다.
선생님은 음악뿐만이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큰 스승님이셨다. 내가 귀국해서 활동을 시작하자 선생님께서는 조언을 해주셨는데 바로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 이었다. 비록 철저히 규칙적으로 살고있지는 못하지만, 허약한 나를 예술가로서 나아가도록 돕는 조력자가 바로 운동(수벽치기)이다. 틈틈이 수벽을 수련하는 버릇을 강준일선생님께서 들여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것같다.
2004년에 내가 비올리스트 박성봉씨와 결혼할때 선생님께서 선물로 써주신 곡이 있다. '우리의 사랑은' (강준일 작사,작곡)이다. 혼인 때 신랑신부가 부르라고 하셔서 불렀는데, 곡은 너무도 아름다운데 미흡하게 불러서 아쉬웠었다. 선생님께서
급작스레 돌아가신 해에 내 아버지도 소천하셨다. 그 해에 독주회에서 '우리의 사랑은' 곡을 바이올린과 비올라로 연주하고, 앙콜은 아버지가 좋아하셨던 칸쪼네를 바이올린 독주로 편곡해서 연주했다. 힘든 시간들이 지나갔다. 우연인지…정릉 사시던 음악인들이 2014년과 2015년에 하늘로 향하셨다.
선생님께서 남겨주신 숙제가 있다. "보연이 너는 편곡하길 좋아하니, 내 곡을 바이올린 독주로 바꿔서 연주해봐라.
'검무'가 좋겠구나."
나에겐 너무나도 어려운 작업일 것이다. 하지만 잊지 않고 조금씩 노력해서 실현해야 한다.
선생님께서 돌아가셨다고 해서 멀리 느껴지지 않는다. 곡을 해보면 정말 그렇다. 음악으로 바로 연결되니 도리어 이제 더욱 가까워질수 있다. 음악을 놓치지 않도록 정신 차리고, 선생님께서 가신 길이
진정 무엇인지 우리 후배,제자들이 잘 따라갈수 있기를 바란다.
유민희 (국악작곡가)
#전통예술원- 2기 작곡가 유민희
나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99학번으로 입학을 했다. 대학생이면 여유 있게 학교 다니면서 놀 시간도 많을 것 같았는데, 수업도 과제도 많았다. 그래도 행복했다. 내가 원하는 학교에 들어가서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선배언니들에게 이런저런 학교 이야기를 주워듣는데 어느날 강준일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엄청 무서운 분이시지만 뭔가 좋기도 하다는, 두려움과 기대가 동시에 생기는 순간이었다. ‘저 분께 배우고 싶다’는 생각과 ‘과연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라는.
1,2학년이 지나고 동기친구가 자퇴를 했기 때문에 나는 혼자 학교를 다녔다. 그래서 나는 강준일 선생님 외 많은 선생님들과 독대(獨對) 하게 되었다. 혼자 수업을 듣는다는 것은 많은 장점이 있지만 내가 빠지면 선생님이 혼자 계셔야 하기 때문에 결석을 해서도 안 되고 휴학을 하면 학년이 없어지기 때문에 휴학도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열심히 다녀야했다.
선생님을 첨 뵈었을 때, 언니들의 말대로 뭔가 엄격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하지만 난 선생님 앞에서 까불기도 잘 하는 학생이었다. 현악 사중주와 목관 8중주를 분석하고 피아노곡으로 만드는 공부와 역으로 피아노 악보를 현악 사중주와 목관 8중주로 만드는 공부가 선생님과의 첫 학기였던 것 같다. 숙제에 대한 부담이 있지만 어느 날 너무 하기 싫어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수업에 나가서 두려운 마음은 감춘 채 선생님 앞에서 쌩글쌩글 웃으면서 “선생님 숙제를 못했어요. 그래도 안 오는 것 보다는 오는 것이 나을 것 같아요” 라고 말했더니 선생님께서 피식 웃으셨다. 봐주신다는 의미이다. 선생님이 준비해 오신 수업을 듣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하루는 선생님댁에 전화를 했다. “어 민희 왜?” 라고 물으셨는데
“봄 날씨가 너무 좋은데 선생님 생각나서 안부전화 했어요” 라고 했더니 싱겁다는 듯이 그래 하고 끊으셨다. 괜히 오지랖 넓게 전화를 했나 하고 말았는데
한참 후에 언니들에게 들으니 선생님이 민희가 봄날이라고 전화를 했다며 수업시간에 기분좋게 말씀하셨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도 웃었다. 선생님은 항상 어려운 분이시라고 생각했는데 틈틈이 보이는 선생님의 따스함이 멋스럽게 느껴졌다.
그렇게 선생님과 나는 전문사 과정까지 함께하게 되었다.
창작이라는 열린 세계에서도 전통을 고수해야한다는 강박이 새로운 시도를 방해한다는 느낌으로 다가왔을 때 선생님과의 수업 중 표현주의 한국음악작곡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전통을 지켜나가되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풀어 나가보자. 라는 도전을 하게 되며 나의 작품에 대해 애착을 가지게 된 것 같다. 그 후 과감함도 생겼다. 국악고등학교 시절부터 되는 것 보다 안 되는 것이 많다고 생각했던 규율과 법칙에서부터 표현의 자유를 알게되었다고나 할까?
2007년 국립국악원 주최 온나라 국악경연대회에서 금상을 수상했다. 내 곡을 듣고 한 심사위원 선생님께서 유민희는 누구 제자냐고 거문고하는 선배에게 물으셨다고 한다. 강준일 선생님 제자라는 말을 들으시고는 그 분이 아~~~~ 그렇다니 이해가 된다라는 대답을 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왜 그런지 기분이 좋았다. 강준일 선생님께 선생님을 닮은 많은 제자들이 있다. 그 중에서 나는 선생님을 쏙 빼닮은 제자는 아닐 것이다. 그것은 나의 작곡의 첫 걸음이 국악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출발지점이 다르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39세가 된 나는 느낀다. 내가 작곡하는데 있어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기둥 중 하나는 강준일 선생님의 흔적이라는 것을 말이다. 전통예술원 개원 이후 한국음악에서 기록된 작곡가의 역사와 작곡 교육의 역사가 길지 않아 생긴 빈틈을 채워주는 역할을 강준일 선생님이 하신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얼마전 미국에 있는 음악 저널리스트에게 당신은 국악기를 잘 다루는 작곡가이다. 당신의 음악은 감성적이지만 좋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라는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나는 구조가 좋다라는 부분에서 강준일선생님을 생각했다. 음악가라면 가지고 있어야 할 당연한 음악논리에 대해 그 분을 통해 배웠기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음악은 서양음악과 그 전개 방식이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음악을 기본적으로 공부해야 했고 동시대성과 보편성을 가지기 위해 당연히 서양음악도 공부해야 했다. 오히려 창작음악은 서양음악 작곡방식을 따라가기도 했다. 새로 만드는 창작 음악이야 작곡가가 주도하여 자신의 음악세계를 담으면 된다고 하지만 한국음악 작곡가들에게 알 수 없는 사명감? 무게감? 같은 것도 존재하기 때문에 법고창신의 정신을 늘 떠올리게 된다. 한국음악 작곡가 선생님들에게는 전통음악을 배웠고 강준일 선생님께는 서양음악의 어법과 논리를 배웠고 그 논리를 가지고 전통에 다가가는 작곡가가 되었다. 그 두 가지 에너지가 전통예술원 출신 작곡가들이 작곡 활동을 계속 할 수 있는 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가끔 선생님을 생각한다.
한 번은 지명신 선생님을 만나러 가기 전 안부 편지를 쓰면서 선생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구구절절 자신의 마음을 보이지도 않으셨던 선생님의 절제된 사랑이 감춘다고 감춰지지 않고 전달되었고 남아있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람이 자신의 흔적을 잘 남긴다면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돌아가신 스승님들을 통해 하게 되었는데, 내게 그런 생각이 들게 하신 두 분의 스승님 중 한 분이 강준일 선생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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